윤회
윤회는 또다른 의미의 영원설이다. 어떤 형태로든 ‘나’라는 존재가 영속하기를 바라는 마음,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반영된 사유체계라고 할 수 있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죽은 이의 윤회가 죽음이 초래한 슬픔에 당장 위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은 이를 아무리 그리워한다 하더라도 죽은 이가 막상 돌아왔을 때 그저 반갑기만 할 것인지 몹시 당황할 것인지 그것을 묻는다면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진짜 진심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인 것이다. 삶과 죽음이 마구 섞이기를 바라지도 않는 것이다.
만약 죽음을 윤회의 선상에 놓는다면 삶은 또 어떠한가? 영원히 죽지 않는 변형적 쳇바퀴의 굴레를 벗어나지 않는 일이다. 죽음과 삶의 경계도 없어지며 죽음과 삶의 의미 또한 다시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자연의 역사 속에 수 많은 생명체가 태어나고 살다 죽어갔다. 이 장대한 나고죽음의 흐름에서 그런데 한 개체의 윤회가 왜 그렇게 필요한가? 인류 역사에 아무리 큰 기여를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온 이가 증명된 바 없다. 문화공동체가 뇌의 기억과 그 정보 속에 그렇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다른 개체이다. 우리 몸 자체도 일생동안 음식을 먹고 부단히 몸을 이루는 재료들을 새롭게하면서 생명현상을 이어가다가 그것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모든 생명현상을 일시에 중단하는 것이다. 그것이 죽음이다. 낙엽이 떨어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듯 인간의 죽음 또한 생겨난 것의 자연스런 이치이다.
완전한 죽음은 나뭇잎의 죽음처럼 완전한 죽음이다. 그것이 거름으로 다시 나무의 영양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나뭇잎 개체 자체는 죽은 것이다. 하물며 동물은 더욱 그러하다. 윤회를 믿기보다는 생명체로 태어난 것에 감사하고 생명체를 귀히 여기고 살아 있는 동안 진실하고 행복하게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것이 인류 진화에도 도움이 된다.
lampeer(2019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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