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mpeer칼럼

동학기행(東學紀行) /공주 우금치와 정읍 일대

lampeer 2019. 7. 18. 14:54

* 동학기행(東學紀行)  /공주 우금치와 정읍 일대

 

(2016년 10월 31일 작성)

2016년 10월 22부터 23일까지 이틀에 걸쳐 천도교종학원과 정읍시가 주최한 동학유적지 기행이 있었다. 이번 기행의 특징은 ‘공주 우금치전투’와 ‘정읍(고부)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답사로서, 1893년 11월 거사가 모의되고, 1894년 1월 결행된 이래 일 년에 걸친 동학농민혁명의 발발과 전개, 전환과 결말 가운데, 일정상 발발 부분에 해당하는 고부봉기와 결말 부분에 해당하는 우금치 전투를 집중 견학한데 있으며, 동학혁명 전문가와 정읍 현지 역사 전문가의 현장감 있는 설명이 추가된 의미와 의의가 있는 답사여행이었다.

첫째 날은 공주지역으로, 동학농민혁명 대미(大尾)의 전투인 우금치현장과 그 주변의 송장배미 방문이었다. 현장 설명은 종학원의 성주현 교수가 맡았다.

우금치는 전봉준 선생이 이끄는 남접(좌도)동학농민군과 손병희 선생이 이끄는 북접(우도) 동학농민군의 이만여 연합군이 관군과 일본 연합군의 총 포화에 맞서 장렬한 전투를 벌이고 산화한 무명영웅들의 넋이 깃든 곳이다. 죽창을 들고 흰 옷 입은 용사들! 그들이 앉으면 죽창의 바다라 ‘죽산(竹山)’이요, 서면 흰 옷의 바다라 ‘백산(白山)’이라는 기록에 전하듯, 흰 옷 입고 죽창 든 동학농민군이 산을 덮었을 것이며, 그 죽산과 백산이 이내 혈산이 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인간됨에 대해 숙연한 마음과 더불어 정의(正義)의 역사의 장엄함에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퇴각하는 동학농민군을 쫓아 학살을 서슴지 않았다. 무참히 학살된 그 자리에 세워진 ‘송장배미’ 비석은 동학농민군의 피맺힌 함성처럼 검붉었다.

송장배미를 지나 산행의 시작점에서 만난 거의 방치되다시피 서 있는 ‘동학혁명군위령탑(東學革命軍慰靈塔)’과 조형물들은 공주시의 동학에 대한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우금치현장은 오르내림의 반복이 심한 주미산 능선에 있었다. 실제로 답사한 4시간여에 이르는 맨손의 능선 산행에서조차 잦은 오르내림 속에 작은 설악산처럼 가파랐고 작은 지리산처럼 오밀조밀해서 거칠고 쉽지가 않았다.

화력이 막강한 관군과 일본군의 고지대 점령이 있었고, 능선 아래로는 칠팔십도에 이르는 낭떠러지 같은 가파른 지형이 이어지는데, 이를 열세한 총기와 죽창, 곡괭이를 든 동학 농민군이, 적진을 뚫고 가로질러 능선을 넘어 공주를 거쳐 서울로 향하려 한 절대 불리한 전쟁구도였다. 효포와 송장배미지역 등 우회로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주력병력이 능선을 가로지르려는 시도를 하다가 대패한 전쟁이었다.

왜 그랬을까? 전봉준은 그 당시 전쟁의 장군이라기보다는 지역의 한문선생, 향토지식인이었으며, 손병희 또한 무사가 아닌 종교지도자였다. 그들은 시대를 고민하는 자각한 지식인, 동학(東學)의 선생으로서, 역사와 민중이 가리키는 도도한 시대의 명령, 정의(正義)를 위해 일어서야한다는 당위, 유불리를 따지지 않는 마음의 정언명령을 따라 일어섰으며, 그를 실천하다 간 것이다. 그들이 지향했던 방향은 옳았다.

봉건 왕조의 시대에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서 무장혁명을 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사실 놀랍다. 동학농민군의 열악한 무기로 황토현 전투와 황룡 전투에서의 대승도 놀랍다. 그들은 몸과 정신을 무기로 싸운 것이다. 국가가 군사 주권을 포기하고 침략 야욕에 불타는 일본에 국가의 안위(?), 권력의 안위를 맡긴 상황에서 동학농민군의 저항은 그 자체로 놀랍다. 우금치 전투는 전술적으로는 부족했을지 모른다. 일 년 간 수많은 전투를 치루고 11월 우금치전투의 대미에서 전봉준, 손병희 지도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배수진 없이도 죽음의 길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행군, 그 뜻은 현대의 우리가 풀어 나아가야할 과업이 아닐까?

공주 우금치전투지 답사를 마치고 저녁에는 다음 날 답사지인 전북 정읍을 향했다. 산행으로 지쳤지만 모두 숙연했다. 정읍시에서 제공해 준 깔끔한 숙소에서 식후, 정읍지역 향토사학자 박대길 박사의 강의가 있었다. 전봉준 선생 묘지 발굴의 진행과 관련된 것으로 최근 향토사 연구의 동향을 살필 수 있었다. 왕조 중심의 중앙 거시사(巨示史) 연구 못지않게 지방의 미시사(微示史) 연구도 우리의 역사를 좀 더 사실에 가깝게 입체적으로 드러내는데 유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날은 김생기 정읍(井邑) 시장과 조식(朝食)이 있었는데, 민족의 위기마다 나라의 우물마을로서 정읍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정읍시의 자부감과 동학하는 사람들의 책임감이 공유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오전에 동학혁명의 시작점인 정읍 고부(古阜)의 대뫼마을(죽산)과 고부관아터, 동학혁명모의탑(東學革命謀議塔),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탑, 구민사(救民社), 황토현전승지,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돌아보았으며, 오후에는 전봉준 고택을 견학하고 말목장터를 지나, 예동마을 근처에 올해 조성된 ‘동학농민혁명최초봉기 상징조형물’ 앞에서 내력을 듣고 마지막으로 만석보터를 방문하였다.

정읍 답사 일정 내내 설명을 도맡았던 박대길 박사에 의하면, 고부동학농민혁명은 혁명모의, 예동 집합 신호, 말목장터 집결, 고부관아 점령 및 만석보 파괴의 4단계로 요약된다고 한다.

이중 첫째, 혁명 모의 단계는 혁명모의문(革命謀議文) 즉 동학(東學) 각리(各里)의 집강(執綱)에게 보내는 격문(檄文) 자체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각리 집장(執綱) 좌하 사발통문에 ‘..다음과 같이 격문을 사방에 널리 전하니 여론이 솥안의 물처럼 들끓었다(如히 檄文을 四方에 飛傳하니 物論이 鼎沸하야). 매일 난망을 구가하던 민중들은 처처에 모여서 말하되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 하며 기일이 오기를 기다리더라. 이때에 도인(道人)들은 선후책을 토의 결정하기 위하여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가(宋斗浩家)에 도소(道所)를 정하고 매일 운집하여 차서(次序)를 결정하니 그 결정된 내용은 좌(左)와 같다. ’

그 내용은 ‘고부성 격파와 조병갑 참수, 군기창과 화약고 점령, 아첨 탐리(貪吏) 격징(擊懲), 전주영(全州營) 함락과 한양(京師)으로 직향(直向)’이었다고 한다.

1893년 11월 전봉준 등 이십 인은 평등사회 염원과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게 사발모양으로 둥글게 서명하는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짓고, 새로운 세상을 결의하며 거사를 계획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1894년 1월 10일 고부봉기를 단행하였는데 이때에는 격문(檄文)을 써서 각 지역 집강에게 보낸다. 이것이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며 사발통문으로 인해 혁명은 전국차원으로 들불처럼 일어난다. 동학농민혁명은 발발한 이래 일 년에 걸쳐 반봉건의 평등사상에 더하여 반외세의 민족자주를 견지했다.

동학농민혁명 거사를 도모하며 사발통문을 작성한 집은 현재 개인소유로 되어 있었는데, 집 입구의 ‘동학농민혁명 모의장소’이라는 안내문과 집 중앙 처마와 맞닿은 벽 깊숙이 ‘사발통문’의 복사본이 액자에 들어 걸려있어 그나마 사발통문 작성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발통문’의 내용을 보면 동학농민혁명이 단순 민란이 아니라 동학의 이(里) 집(執)조직을 이용한 조직적인 혁명거사였음을 알 수 있다. 자료에 의하면 동학혁명 주도자들의 후손들이 동학혁명모의탑(東學革命謀議塔)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을 세우고 그 자리에 ‘사발통문’을 영구 안치하였다고 한다. 동학혁명모의탑은 깔끔하게 잘 관리되고 있었다.

대뫼(죽산) 마을 송두호가(宋斗浩家)에서 오 분 거리에는 전봉준 선생을 기리는 녹두회관 안에 동학농민혁명 홍보관이 있었는데, 그다지 크지 않은 공간에 매우 효율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잘 설명해 놓고 있었다. 건물 앞마당엔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無名東學農民軍慰靈塔)’이 있었는데, 이한열 열사를 어깨에 부축한 죽창 든 동학농민군의 모습이 새겨진 비석은, 평등한 세상 탐학 없는 세상을 꿈꾸고 실천했던 동학농민군의 바램이 백남기 농민과 오버랩되면서, 현재진행형으로 다가왔다.

고부 동학 혁명의 두 번째 단계인 예동 마을은 답사코스에서는 네 번째 단계인 고부관아와 세 번 째 단계인 말목장터를 먼저 방문한 후에 갔다.

고부관아는 현재 초등학교가 들어서 있고, 고부관아였던 표시판만 학교 체육관 앞에 덩그러니 서 있어서 일부러 알고 찾아오지 않는 한 이 곳이 고부관아터였는지 알 수가 없을 것 같다. 악명 높은 고부군수 조병갑,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확대 재봉기의 계기가 된 정부 파견 안핵사 이용태의 가혹한 탄압 등 악명 높은 고부관아터에 후임도 자리 잡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교육의 현장이 되 있어 과거의 악몽을 희망으로 바꾸고 있다고 위안해본다.

관아터를 떠나서, 승리한 곳답게 너른 벌판에 잘 조성된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탑, 구민사(救民社), 황토현전적지,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보고, 전봉준 선생 고택에 들렀다. 시골 중산층 정도 되는 아담한 초가집으로, 굳이 전봉준 선생이 각지에 보낸 격문(檄文)에서 ‘초애의 유민(遊民)이나 차마 나라의 위기를 앉아서 볼 수가 없다. 군자들은 한 목소리로 위로는 종사를 돕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케 하기 바란다.’라고 말한 까닭이 읽히는 집이었다. 주변이 잘 정돈돼 있고 젊은이 중심의 답사단도 제법 띄었다. 말목장터에서는 우리 일행이 탄 차를 정거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는데,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옮겨 보존 처리된 옛 말목장터의 대형 감나무를 이미 본데다, 말목장터 현장에 젊은 답사객이 그득 차서 버스를 정차할 공간이 마땅치 않아서였다. 최근 동학공부 바람이 분다는 말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말목 장터를 지나친 버스는 예동 마을이 바라보이는 ‘동학농민혁명최초봉기 상징조형물’ 앞에 섰다. 예동 마을은 만석보 인근 마을로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의 극치이던 만석보 증축에 동원되어 고초가 가장 심했던 마을이라 호응도 매우 높았던 것 같다. 마을에서 구슬소리를 내어 그 신호에 따라 말목장터에 집결한 후 고부관아를 습격 점령하고, 나아가 원성의 상징이던 만석보를 파괴했다고 한다.

끝으로 방문한 ‘만석보유지비萬石洑遺址碑’는 한 켠엔 너른 평야가 펼쳐져 이곳이 얼마나 대단한 곡창지대였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고, 건너편엔 굽이지며 저 멀리 흐르는 동진강 강물의 유장함과 이름 모를 수많은 들풀들로 일대 장관을 이루며 천연색의 생명이 주는 감탄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만석보유지엔 바람이 세찼다. 권력을 쥔 한 인간에서 시작한 탐학이 이 아름다운 낙원을 지옥으로 만들었음을 알리는 스산한 구슬소리처럼....

생명이 하루도 호흡을 쉴 수 없듯이 국가는 하루도 쉴 수가 없다. 국민의 대리자이면서 국가와 민족보다 자신의 권력 지키기를 최우선으로 하는 권력자들, 그들은 다만 권력의 탐학자일 뿐 국가의 지도자가 아니다.

조선말기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학정과 일본침탈의 위기를 맞아 민중에게 탈출구를 열어주었던 동학혁명은 동학(東學)의 이치가 혁명(革命)의 실천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21세기 세계는 차별받는 자의 입장에서 요구하는 평등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평등, 생명체 공통에 대한 존중의 평등 정신으로 나아가고 있다. 150 여 년 전 이를 예견하고 인간뿐 아니라(敬人) 사물에 대한 존중(敬物)까지 설파한 동학의 정신은 그래서 인류 보편의 진리로 심원(深遠)하다.

lampeer(20190718)

 

'lampeer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회  (0) 2019.08.13
변화와 생명력  (0) 2019.08.02
신과 인간  (0) 2019.07.04
성공과 명상  (0) 2019.06.20
평화의 시대  (0) 2019.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