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正道)가 중도(中道)
중도(中道)는 이제 일상의 보편언어로 자리잡았지만, 서구인들이 중도를 ‘middle way’라고 번역한것처럼, 대개 중간 평균 균형 어림 어중간 등의 어감으로 인식하게 된 듯하다.
원래 중도는 공(空) 사상과 함께 불교를 설명하는 키워드이다. 중도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 공(空)이기도 해서 이 둘은 같이 나타난다. 경전 가운데, 금강같이 견고한 통찰(正思)의 삼매를 논한 <금강삼매경론>에서, ‘무변(無邊) 무중(無中)한 중도(中道)’라 언급한 것을 보면 중도는 양변도 아니지만 중간도 아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공(空)을 설명하는 중에, ‘속(俗)을 버린 진제(眞諦)으로서의 공과 속을 융합한 진제로서의 공은 모두 참되며 이것이 원성실성(圓成實性)’인데, 이는 ‘진(眞)에도 속(俗)에도 이 둘도 아니라(不二)는 상(相)에도 머물지 않는 중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로 ‘문자나 언어로 나타낼 길이 끊어졌다’라고 하였다.
다소 소피스트적이어서 복잡한 듯하지만, 요지는 예를 들어 주전자의 아이디어와 주전자 자체, 이 모두가 두루 원성실(圓成實)한 하나이지만 이 자체보다는 주전자에 물을 끓여 물을 마셔야 주전자의 전모가 드러나는 것으로, 말과 언어로는 주전자의 뜻을 모두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차를 끓여 마시는 데에 주전자의 전모가 있다는 실천 실제까지를 강조한 말이기도 하다. 우리 머리 속에 떠도는 수많은 이념들 중 실천된 것이 전모가 드러난 중도의 범주에 들 수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잘 된 중도(中道)는 시작도 중간도 끝도 한결 같을 것이다.
유학(儒學)의 <중용(中庸)>과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 보면, 군자는 변화무쌍한 인심(人心)을 닦아 인간 바탕에 지닌 성품(性)인 도심(道心)을 밝힌 성인(聖人)이 되려 수신(修身)하는 자이다. 수신하여 세상을 평안하게(平天下) 하려는 자이다. 그러기 위하여 이들은 배우고 알고(知) 힘써 행하며(仁) 수치를 바로잡는(勇) 덕목을 지성(至誠)으로 닦아 선(善)을 이루고 감통(感通) 감천지(感天地)에 이르고자 한다. 유가 역시 잘 된 중용(中庸)은 정밀함과 한결같음(唯精唯一)이라고 하였다.
<중용>에서 군자의 중용은 ‘가장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이라 하였고, 공자는 ‘칠십에 이르러서 듣고 말하고 임의롭게 행하여도 허물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로 미뤄 보건대, 중용(中庸) 중도(中道)란 지극한 정성으로 시대정신과 시절인연을 읽어서 밝게 알아 시대와 인간이 나아가야할 바의 가장 적절 적중(的中)한 지점, 최선(最善)을 찾아서 이를 내내 한결같이 행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인지가 발달해 감에 따라 지식인 유명인의 외침이 진정 진리의 추구자, 진리행위자로서 행한 것이었는지 단지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한 것이었는지 결국 알게 된다. 대의와 명분을 내세워 자기정치를 하는 것과 진짜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행하는 것, 그 차이는 행위자의 전 생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같이 시대의 정신을 불렀지만 절규해 부른 것이 진짜 시대의 이름이었는지 다만 자기 이름이었는지 그의 생애를 통해 알 수 있다. 어중간한 중도(?)의 줄을 타고 어느 때 어느 환경에서나 살아 남았지만 한번도 진정한 진리의 수호자도 진정한 자신도 아니었던 사람도 있다.
진실을 추구해 나가는 것, 거기에는 스스로 속일 수 없는 정직이 깔려 있다. 정직은 바른 길이며 바른 것이 선(善)이다. 영어에서 바르다(right)는 것은 ‘도덕적 선(morally good), 정의(justified)’을 뜻한다.
중도란 어중간한 평균이 아니며, 어부지리도 아니다. 중도의 middle way는 오역이며, right way, 정도(正道)라고 번역했어야 원래 뜻에 가깝다. 말해야 할 때 말하고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할 줄 알며, 예 할 때 예하고 아니오 할 때 아니오 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진짜 중도다.
시대정신을 바르게 읽는 것이 정도(正道)이며, 정도의 드러남이 중도(中道)이다.
lampeer(2019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