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과 들
대도시인데도 집 근처에 엄청난 규모의 자연생태 공원이 있었다. 염전 밭엔 소금이 익고 개미취와 억새들이 온통 뒤덮은 벌판을 아이들과 함께 휘젓고 다니면 하루해가 기울고 아름다운 석양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생태공원에 이르는 초입새엔 나무 다리가 있었는데, 인근 바다의 밀물 때면 다리가 물에 잠겨서 발을 적시며 난간을 잡고 다리를 건너야 했다.
어느 날 그 공원은 두부 자르듯 반 토막으로 나뉘었고, 공원 쪽은 느닷없이 덴마크풍의 풍차가 들어섰으며, 다른 쪽은 골프장이 들어선다는 소문이고, 멀리 아파트단지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개발과 함께 땅은 진흙탕으로 변하여 더 이상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달릴 수도 없게 되었다. 바닷가 근처까지 아파트가 들어섰고 지하철이 개통되기 직전 그 마을을 떠났다.
지금은 또 다른 자연이 있는 마을에 산다. 그러고 보니 자연이 있는 곳으로 이사 가서 자연을 누리다가 자연이 사라지면 다시 자연이 있는 곳을 따라 이사를 했던 거 같다. 여기는 서울 근교이지만 그린벨트로 묶인 곳이고 서울 지역에 정수를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공장도 들어서지 못하는 곳이다. 그래서 쉽게 개발이 들어서지는 못할 것 같다.
강변에 나가 숲속과 들판들 사이로 띄엄띄엄 들어선 아파트와 주택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숲 속 자연의 일부인 것 같아서 좋다. 석양 빛에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천년 전 누군가 이 강물을 바라보았을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인간이 땅을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가 인간의 삶을 정말 다르게 인도하는 것 같다. 성공해서 큰 돈을 벌어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어느 성공한 비즈니스맨이, 은퇴 후 시골에 멋진 집을 짓고 마음껏 누리고 자연을 즐기면서 살 거라고 하자 나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고 한 어느 시골사람의 말처럼 인간은 결국 어머니 고향 자연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같이 있으면 번거롭다 하고 혼자 있으면 외롭다 하는 게 인간이다. 우리는 그 삶의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생물학적으로 누구나 동일한 원리로 삶과 죽음을 맞는다.
그 복잡한 삶의 과정을 어떻게 하느냐는 결국 나의 선택의 문제이다. 어디서 살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을 것인가 어떤 직업을 갖고 누구를 사귈 것인가 무슨 활동을 할 것인가는 최종적으로는 나의 선택의 문제이다. 나의 뜰을 가꾸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다.
뜰을 넓히면 들이다. 나는 다만 나의 뜰, 나의 생각의 뜰을 가꾼 것이 결국 집 앞의 들, 들판을 가꾸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 내가 정직하게 진심으로 나의 뜰을 가꿔왔는지 나의 가족을 가꿔왔는지 나의 사람을 나의 아이들을 나의 동료들을 가꿔 왔는지 돌아보는 오늘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위에 어떻게 비추느냐 또한 모든 변명과 더불어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나의 몸을 보살피는 심정으로 나의 뜰을 가꾸고 그 결과가 우리의 들판도 가꾼 것이 되기를 바라는 오늘이다. 내가 짓는 행복이 나의 가족의 행복이듯 인간이 짓는 행복은 인류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lampeer(2018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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