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이니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들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 42장 3~4 저는 제 자신이 참 탐구자라고 확언할 수 없을뿐더러 또한, 참 신앙인이 못되고 있음을 너무나도 명백히 보고 있기에 감히 이런 글을 써 나갈 수 없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 글을 씀은 제 마음의 닦임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런 종류의 내용에 한해서는, 제 마음에 품어진 것들을 조금도 밖으로 표출함이 없이 마음 속에서 말끔히 녹여버리기가 힘이 드는 것 같습니다. 뿜어내짐이 없이 속에서 맑게 녹여져 빈 마음이 되기를 무던히 기다려보았지만, 아직도 찌꺼기들이 남아 있어 모든 것을 마냥 미소로써 바라보아 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갖는데 독이 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제는 표출해내는 방법을 택해서라도 날카로움을 제거해버리고, 온전히 깨끗하게 비어있는 포근한 마음을 찾고자 하는 바람입니다. “남의 눈에 티는 보고 네 속에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가” 주님 용서하십시오. 아멘. 참 탐구란 자신의 정신과 마음이 진실로 고개 숙일 수 있는 진리에만 매이고, 어떤 이름의 종교적 교리나, 학문적 개념이나 사상 등에 자신을 묶어 둘 수 없는 정신입니다. 한 올의 가능성도 교리나 개념 따위에 의해 형성된 편견으로 인해 그냥 부정해 버리지 않고 한 올의 회의도 그냥은 숨겨 버릴 수 없는 정신입니다. 무조건적 부정이나 무조건적 긍정이 있을 수 없는 정신입니다. 진심으로 자신의 마음의 지극히 미미한 흔들림도 어설프게 넘겨버릴 수 없고, 밖으로 또렷하게 나타내어 인정할 수 있는 정신입니다. 다시 말하면, 외부에 의한 또는 자신이 가지게 된 어떠한 기존의 관념에 의해서 형성된 편견도 달라붙어 있지 않은,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으면서도 모든 것에 의해서도 채색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진정 순백의 요소만을 걸러낼 수 있는 자신의 마음이란 투철한 여과기를 갖추고 있는 정신입니다. 참 탐구란 깨어 있을 때나 잘 때나 일을 할 때나 항상 모든 의식과 무의식이 총동원되어 찾아내야만 하는 그 유일의 진리를 바라보며 그것을 갈망하는 정신입니다. 자신이 각고 끝에 깨달은 진리가 아무리 큰 것일지라도 회의가 스미는 순간 어떤 진통을 겪더라도 그것으로부터 빠져 나와 완전의 진리를 향해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정신입니다. 최고의 완전의 그것을 꿰뚫었음이 스스로 자명해 보일 때까지는 절대로 자신을 정지시켜 고착화 해 버릴 수 없는 정신입니다. 비록 주님의 진리를 깨닫고 기뻐하고 확신하는 순간이 있을지라도 입에서 한숨이 나오는 순간이 닥친다면 자신이 깨달은 주님의 진리의 완전성에 회의를 품고 다시금 자신이 깨닫지 못한 주님의 더욱 깊숙한 본질을 향해 나갈 수밖에 없는 정신입니다. 항상 우주의 깊숙한 본질에 대한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경외감과 신뢰와 겸허함과 사랑에 머물러 있어, 감히 완전에 도달했다고 명백히 보기 전에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가 오묘한 본질의 전부라고 망령되이 말할 수 없는 정신입니다. 참 탐구란 본질에 대한 겸허와 신뢰와 사랑으로 넘쳐 그곳에 도달하기까지는 결코 자신이 찾아낸 진리란 함정에 걸려들 수 없는 정신입니다. 참 신앙이란 엄마의 동화를 듣고 있는 어린 아기의 마음입니다.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신뢰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조금의 거부감도 일 수 없는 마음입니다. 단군신화를 먼저 들었더라면 곰이 사람됨도 조금도 이상하게 여겨지거나 의심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성경의 구약말씀의 기적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물 위를 걸음이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 는 사실 등으로 기쁨이 온다면, 그것은 참 신앙의 마음과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음임을 생각하십시오. 참 신앙 속에는 ‘증거’나 ‘증명’이란 개념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참 신앙은 자신이 자신의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으로 헌신을 드리듯, 다른 이가 다른 이의 ‘주님’을 신뢰하고 헌신하는 것을 조금도 탓 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자신의 ‘주님’ 과 다른 이의 ‘주님’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할 수조차 없고, 따라서 다른 이를 자신의 ‘주님’에게 오게 할 생각조차 스밀 수 없는 마음입니다. 다른 이가 잘못된 길을 걷는다라는 생각이 아예 스밀 수 없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 신앙이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모든 것이 똑 같게 보이고, 모든 것이 사랑스러운 마음입니다. 한번이라도 자신의 색깔이 다른 이의 색깔과 달라져 있다는 생각이 스친다면 참 신앙에 머무르고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참 신앙에는 진정한 의미로 ‘전도’라는 개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똑 같은 모든 것을 철철 넘치게 사랑할 뿐입니다. 일반적인 의미의 ‘전도’라 함은 이미 자기 것과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비교했음이고, 그래서 자신의 것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리하여 자신의 길로 다른 이를 인도하겠다는 생각이 스몄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참 신앙이란 구별을 느낄 수 없는 순백의 마음임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이 ‘세상 끝까지 전도하라.’ 하심은 기독교를 믿게 하라 하심이 아니고 모든 것을 구별할 수 없는 참 신앙 속에서 모든 것에 대해 본질적인 사랑을 퍼부으라는 뜻일 것입니다. 기독교를 믿게 만드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전도가 아니고 모든 것을 구별 없이 사랑함을 통해 그들도 또한 모든 것을 구별할 수 없이 사랑하는 이가 되게끔 변혁시키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전도인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라.’ 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참 신앙은 그 속에 ‘기독교’ ‘교리’ ‘이단’ 등의 말 따위는 들어 있을 수 없는 마음입니다. 오직 모든 것에 대해 구별할 수 없는 철철 넘치는 사랑의 순백의 마음입니다. (1983년 11월) 지월 이재웅 지음<묘하고 묘합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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