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월 마음 탐사일지1

우리 스스로의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모아감이 어떨까요

lampeer 2016. 6. 23. 13:58

우리 스스로의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모아감이 

어떨까요

 

 

 이제 우리는 현대 과학 발전을 토대로 수백 년 전쯤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세계의 다양한 사실들을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막 실상의 진면목에 새롭게 눈을 뜨고 있습니다. 그에 맞게끔 21세기의 사상, 종교, 구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고 구축해 갈 때라 봅니다.

 

2000년 전쯤 많은 대중들이 하늘의 별들을 신화로 바라보는 시대에 구축한 구도의 패러다임을 수천억의 은하가 있음을 파악하기 시작하고 우주의 빅뱅, 은하 중심의 블랙홀, 시간의 물리적 상대성, 유전자 DNA, 단일 세포 내의 사회적 구조, 인간의 감정과 호르몬, 뇌 속의 뉴런 네트워크 등등. 새로운 개념과 단어들이 이미 일반적으로 대중화되고 있는 21세기 초엽에 그대로 답습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인류가 새로운 구도의 패러다임, 미래 천 년을 향한 구도의 개혁을 열어갈 때라 여겨집니다. 믿으려고 애쓰는 신()보다 확연히 앎으로써 형성되는 신뢰와 신념 그러한 신()이 매우 견고합니다. 아침마다 동쪽에서 해가 뜨는 것을 믿기 위하여 애써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확연히 알고 있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이 견고하게 믿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건 진실과 실상을 추구하는 개혁가들은 항상 자연스럽게 그렇게 해왔습니다. 공자도 석가모니도 예수도 소크라테스도 모두 그 시대의 인식을 배경으로 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펼친 혁명적인 개혁가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종교, 철학사상의 현실은 자꾸 동서양 과거의 종교, 철학사상, 구도 방법들을 주로 내세우고 그것에 매달리고 그것을 신성불가침으로 여기는 경향이 짙은 듯합니다. 자신들의 개혁적인 새로운 목소리를 내는 데에 사용하는 에너지의 비율이 아주 낮은 듯합니다. 과거의 훌륭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과거의 가르침을 높이고 따르고 믿으려 하면서 그것들에 갇히고 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흔히들 우리는 미개함으로 인하여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믿고 따르는 것을 미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확히는 어떤 과거의 훌륭한 가르침이라도 그것을 신성불가침으로 여겨 변화를 추구하지 못하고, 계속 마냥 믿고 따르며 스스로 갇히는 것 역시 미신입니다.

 

생명현상은 계속 변화하는 것이 그 핵심적 특성입니다. 과거 훌륭한 가르침이라도 그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나서 새롭게 변화시키고 확장해가는 것이 생명체 생명현상의 자연스러움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종교 철학적 가르침도 시대와 인식의 변화에 맞추어 변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수천 년, 수백 년 된 것을 자꾸 믿고 따르려고만 합니다. 진짜 소중한 것은 그것들로부터 벗어나서 그것들을 개혁 확장하고 스스로 자유롭게 발전하여 가는 것입니다. 2000년 전쯤 과거에만 그리스도, 붓다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분들의 가르침은 왜 변화하여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강하게 고집들을 하는지요? 1200년 전 중국 송나라 시대의 선사들의 화두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는지요?

 

석가모니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하는 말을 무조건 다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너희들 스스로 보고 생각하고 분석하고 경험한 뒤에 받아들여라.” 참 훌륭한 스승의 태도이고 진실을 추구하는 자의 솔직함입니다.

 

새롭게 변화해가고 확장해가고 다시 구성하는 것은 생명현상의 기본입니다. 예를 들어서 과학논문들은 새로운 사실이 들어 있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찾아낸 새로운 사실이 클수록 크게 소중한 논문입니다. 그것을 당연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사상은 왜 과거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리뷰하고 반복하는데 그리 많은 에너지를 쓰는지요? 우리들은 우리들 시대와 인식에 알맞게끔 과거의 사상을 개혁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 구축하는데 우리의 에너지를 훨씬 많이 쓰는 것이 생기로운 생명현상의 주체로서의 도리일 것 같습니다.

 

진짜로 예수, 석가모니를 인류의 스승, 나의 스승으로 여긴다면 그들의 가르침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벗어날 줄을 알아야 할 듯 합니다. 현대의 과학자라면 뉴턴을 존중하면서도 뉴턴을 넘어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을 존중하면서도 당연히 아인슈타인을 넘어서서 새로운 확장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왜 천 년이 넘게 지나서도 예수, 석가모니, 달마, 혜능을 넘어서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지 않는지요? 왜 우리 스스로들 그렇게 하려고 하지를 않는지요?

그분들의 훌륭한 가르침을 확장하고 개혁하여 지구행성 미래 새로운 천 년을 향한 새로운 구도의 패러다임, 그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 가는 것이 다음 세대를 위한 도리일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천 년 전쯤 예수 석가모니는 현재의 우리들의 세상을 소망하고 씨앗을 뿌렸겠지요.

 

청년기에 읽은 가톨릭 서적종교박람회란 책 속의 한 구절이 지금도 여전히 마음에서 메아리 칩니다. ‘너희들 스스로 나(예수)와 같은 독수리들인데 스스로가 병아리처럼 생각하여 독수리처럼 날 생각을 못하는구나!’

미래 천 년을 향하여 우리 스스로의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모아감이 어떨까요?

(2014. 1. 8)

 

지월 이재웅<묘하고 묘합니다> 중에서


 

'지월 마음 탐사일지1'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한강  (0) 2016.06.28
다음 생에 대한 바람  (0) 2016.06.28
엽서 7. 존재의 실체  (0) 2016.06.21
참 잘된 일입니다  (1) 2016.06.15
무상(無常)한 실상(實相)의 역동적 자유 생기  (0) 2016.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