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冥想)과 심상(心想)
명상 중에 나타나는 심상은 마음의 상태를 뇌가 반영하여 시각화한 것이다. 의식 단계의 인식은 그치고, 의식의 간섭을 받지 않는 인식 즉, 자발적 무의식적 상태에서 행해지는 인식이다.
명상 중의 심상을 관찰하는 방법으로, 불교 요가수행자들의 유식학(唯識學)을 다룬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는, 마음에 나타난 심상을 그저 바라보고 분별하지 않는 무분별 영상인 사마타(止)수행과, 분별해서 관찰하는 유분별 영상인 위파사나(觀) 수행을 든다. 그리고 이들을 합하여 심상을 분별없이 두루 살피고 나서 판단하는 단계별 과정을 다룬다. 분별을 그친 안주(安住)와 안주에 기반한 관찰, 즉 그침과 관찰의 지침은 ‘무분별로 분별’하라는 선종의 언어로 거듭난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 중의 의식’과도 통한다.
천도교 종법에서는 ‘마음이 바른 심상은 현기요 마음이 바르지 않은 심상은 망상’이라고 하여 정심(正心)을 심상 관찰의 기준으로 한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말도 너의 맘대로 하지 말고 더 차원 높은 관찰을 행하라는 말이니, 마음을 다루는 영역, 인간이 진실과 진리를 찾는 행위는 종교의 차원이든, 심리학의 차원이든, 명상의 차원이든, 사적 관찰의 한계를 넘고 범주의 오류를 넘어서서 보편적 진리에 이르기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그 지향점이 다르지 않다고 본다. 개인과 전체 혹은 신이라는 관계를 종적으로 보느냐 횡적으로 보느냐, 평등체, 동일체로 보느냐 하는 범주와 철학적 문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오늘날 많은 종교들이 명상을 공통의 도구로 활용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자기 종교가 가진 범주나 해석의 차이를 명상(meditation)이라는 깊은 내적관찰의 기제를 활용하여 해소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영어 ‘medication’은 몸을 치료하는 약을 말하고, meditation’은 마음을 치료하는 약을 뜻한다. 물질성분인 몸을 치료하는 약에 대하여 명상은 정신성분인 마음을 치료하는 약이라는 인식에 근거하여 조어(造語)된 것이다.
마음을 연구하는 생명과학자 물리학자 들은 물질적, 물리적 데이터에 기반하여 마음을 연구한다. 그들의 연구도 사유라는 축이 있다. 심리학자들이나 명상가들은 마음 즉 깊은 심상의 재료, 데이터로 마음을 탐사한다. 뇌연구자들은 명상가들의 명상 중 자기 지시적 과정(self referetial processing)인 뇌의 내정상태 회로가 활성화되거나, 집착을 떠난(let go) 상태에서 후측 대상(帶狀)회로가 조용해지는 것에 고무된다. 일치된 결론이 많을수록 다양한 관점의 연구가 진보한다. 물질 물리적 진보와 비물질적 진보가 상보한다.
명상의 미덕은 과정 자체가 자발적이며 심상 또한 통합적 통찰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관찰하는 일만큼 직접적인 것, 직관적인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나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lampeer(2017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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