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빛, 인식의 표상
우리가 육근(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으로 경험하는 모든 마음의 현상들은 망상이든 실상이든 모두 나의 ‘마음의 빛’ 으로, 나 또는 집단의 의식 내지 무의식이 심리적으로 인지되거나 외계의 현상에 투사되어 나타난 인식의 표상이다.
마음에서 비롯된 현상을 추구하는 한 형태 중에 신비주의가 있다. 이것은 영성(spirituality)과 더불어 인간의 이해 범주를 넘어서는 영역의 일이라 치부한다. 그래서 때로는 어디까지가 진실(true)이고 어디까지가 망상, 환각(false)인지 경계가 모호할 때가 있다. 신비든 영성이든 당사자는 그것을 사실(reality)로, 강력한 경험으로 인식한다.
명상 중에 나타나는 신비한 까시나(표시), 니미따(표상)들도 일종의 이정표이지만 강력한 인식의 경험들이다. 무심(無心) 중에 홀연히 맑고 흰 안개들이 나타났다면 그것은 시각적인 마음의 빛이다.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들었다면 그것은 청각적인 마음의 빛이다.
명상을 하다보면 몸이 미세가루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것은 의식과 몸이 시각화 된 것이다. 그 가루가 무한히 흩어진다면 우주에 편재한 의식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명상 중에 몸에 몹시 고통을 느낄 때 산길을 오르며 눈보라치는 장면이 나타나기도 한다. 두렵고 괴로울 때 몸의 긴장과 더불어 불현듯 나타나는 무섭고 두려운 환영들.... 이것을 아잔브람 스님은 수많은 세상을 살아오며 축적된 윤회의 과정에서 형성된 두려움의 마음의 반응이라고 해석한다. 일상적인 예로 특정 시간에 특정한 음악소리가 장소에 관계없이 홀연히 마음속에서 반복해 들린다면 그것은 마음이 연습한 기억의 인식현상이다. 한편 꿈, 명상, 기도 중의 경험사례들에서 대부분의 관세음보살이 중국옷을 입고 있는 것은 왜 그런가? 독일인에게 관세음보살이 나타난다면 어떤 모습이겠는가? 어떻게든 시청각이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인지현상들은 모두 자기 마음의 빛, 인식의 표상이다.
대체로 명상 중에 눈동자를 위로 올리면 마음이 떠서 미지의 망상들이 주로 나타난다. 눈을 아래로 내리 깔면 마음이 가라앉아 과거의 기억들에 침잠한다. 반개(半開)하고 정면을 응시하면 대체로 맑게 깨어 있을 수 있다. 때로는 인식이 그친 명징한 세계(止,定) 에서 깊은 이해, 통찰(觀,慧)을 얻기도 한다. 이렇게 자세를 어떻게하는가 만으로도 망상에서부터 인식의 파노라마는 다양해진다. 자세 자체가 마음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빛은 그야말로 폭포수와 같이 흘러 자기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고 지나갈 때가 많다.
몸의 떨림 현상이나 신들린 현상들도 두려움이나 집착, 쏠림으로 마음의 평형이 깨진 상태, 컨트롤 능력이 상실된 상태에서 몸이 일으키는 격렬한 반응으로 볼 수 있다. 현재의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감당키 어려운 상황들을 해소하기 위한 자기 치유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반응들은 실로 다양하다. 그런데 일단 일으킨 반응은 그에게 현실이 된다. 자기감응에 의해 현상이 반응하고 반응한 현상에 다시 자기가 감응한다.
손뼉을 치려면 두 손을 마주 해야 하고 라디오를 들으려면 주파수를 맞춰야 한다.
대개 상호작용은 대응, 주파수 맞춤, 감응이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떠한 표상 내지 신비 현상도 나의 마음 상태가 거기에 주파수를 맞추지 않는 한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진행하지 않는 한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행위의 길을 가면 길이 이어지듯 마음의 빛깔, 마음의 인식을 계속 진행하면 마음의 길이 난다. 누군가 나타나 무엇인가를 예언하고 그에 맹목으로 따른다면 그것은 투사된 무엇인가에 의지하는 마음이다. 집단 종교 의식 중에 동일한 체험을 하는 것도 동일 환경에서의 집단적 잠재의식의 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설령 어떠한 심상이 나타났다할지라도 그것은 그의 마음의 빛, 인식의 표상이요, 나의 마음의 빛, 인식의 표상일 뿐이다. ‘선하다’는 어원을 가진 신은 본래 형상을 넘어서 있는 존재가 아닌가!
사실 나타난 마음의 빛, 인식의 표상은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다. 있는 그대로 자기 상태의 반영, 마음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인지하고 해석하고 대처하는가에 따라 현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분석심리학자 C.G.융은 한여름 복중에 북극의 한파가 내려와서 대지를 얼려버리고 사람의 그림자가 사라진 꿈을 세 달에 걸쳐 세 번 되풀이해서 꾸고, 그 두 달 뒤에 일차 세계대전이라는 현실로 드러나자 꿈을 분석하여 집단무의식을 연구하고 개척하였다.
식(識)이 맑으면 까마득한 기억, 예지의 통찰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은 시력의 차이와 유사해서 마음의 맑음 정도, 심력의 차이에 따라, 직관에 의해 사물의 실상을 보는 깊은 견해에 도달하기도 한다. 이것은 인류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고, 유한한 인간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발전시킨 능력이기도 하다. 다만 문명과 도시의 발달, 과학의 발달, 물질주의의 팽창에 따라 오히려 그 능력이 퇴화했을 뿐이다. 지진을 가장 먼저 감지하는 쥐나, 초음파로 교신하는 돌고래, 자체 발광기능을 가진 심해동물 등, 동물들이 특이한 능력을 가진 것도 살아남기 위한 적응의 결과다.
시간, 공간을 포함하여 대상, 자성, 인과 등에 대한 모든 실재 인식은 매순간 ‘지금 여기, 나’로부터 나온다. 인식이라는 것 자체가 ‘나’라는 인식의 주체자로부터 나온다. 마음이 어찌 마음을 떠나서 나올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세계인식, 불교의 세계인식, 유가의 세계인식, 주역의 세계인식, 민속신앙들의 세계인식, 모든 위대한 인식도 ‘나’로부터 나왔다. 붓다와, 예수, 공자, 노자, 마호메트,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각각 그들과 그들의 현재를 떠나서 나올 수 있었겠는가? 그 뒤를 따르는 수많은 인식들도 모두 ‘나’ ‘나들’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이런 사상들이 나온 지 지구의 역사로 보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다.
개인적이거나 세계 도처의 신비한 현상들도, 우리의 이성과 지성, 감성, 지각 등 인식 능력이 확장된다면, 그런 현상들이 발생한 조건들을 이해하는데 이르게 될 것이다. 믿지 말고 이해해야한다. 이해가 쌓이면 저절로 믿게 된다. 보편적 이해가 전제되지 않는 신비주의는 개인의 감성적 차원에서는 아름다울 수 있지만 집단과 개인을 공포로 협박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도 있다. 숨쉬는 인간에 의해 포착된 모든 인식현상은 사후 세계니 영계 체험이니 까지 포함하여 다 인간의 인식이다. 인간 말고 누가 더 인간의 인식을 잘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가 묻는 존재이다.
동물계로 범주를 넓히면 공통적인 마음의 빛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생물계로 무생물계로 우주계로, 물질계에서 정신계로 마음계로 범주를 넓혀 나가면 마음의 빛은 점점 시간 공간의 무한성, 무시간성 무공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보편성과 편재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럴 때 나의 고통이 너의 고통이며 너와 나의 고통, 세계의 고통이 둘이 아닌 이치를 보게 된다. 마음 탐사가 인류 평화, 세계평화와 무관한 게 아니다. 그래서 때론 살아 있고 아직 인식할 수 있음이 감사할 때가 있다.
lampeer(2014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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