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 물질적, 탈 시공적 정보저장매체;
함장식(含藏識)의 필연성과 실재 가능성(글5)
이번 글에서는 물질과 시공을 벗어난 정보저장매체(information storage medium)의 필연성과 실재 가능성에 대한 견해를 말씀 드립니다.
불교 유식론(唯識論)에서는 우주 삼라만상의 정보를 담고 있고, 우주 삼라만상의 발현에 관련되어 있는 의식을 제 8식 또는 아뢰야식이라고 합니다. 아뢰야식에는 발현되지 않은 정보가 잠재적인 상태로 저장되어 있으므로 함장식(含藏識)이라고도 합니다. 유식론의 함장식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탈 물질적, 탈 시공적인 우주 정보저장매체와 관련이 있습니다.
(1) 우주의 성주괴공 대순환과 생명현상의 정보 창조
불교의 성주괴공(成住壞空) 대순환 우주관에 의하면 우주는 시공도 물질도 벗어난 공(空) 상태에서 출발하여 성겁, 주겁, 괴겁의 시기를 거쳐서 다시 공(空) 상태로 돌아가는 대 순환을 반복합니다.
성겁(成劫) 100억년은 생명체들의 탄생과 활동을 위한 자연환경이 형성되는 시기입니다. 현대 용어로 말하자면 빅뱅에 의하여 우주의 시공과 물질 자체가 탄생하고, 그 물질들이 시공 속에서 수 많은 은하, 항성, 행성을 이루고, 행성 위의 여러 환경들이 만들어지는 시기일 것입니다.
주겁(住劫) 100억년은 아뢰야식(함장식)의 정보에 따라서 모든 생명체가 생겨나고 머무는 시기입니다. 각양각색의 모든 생명체들이 전체 인드라망 속에서 상호작용을 하면서 활동하는 시기입니다. 현대 용어로 말하자면 주겁(住劫)에는 화학물질이 무수한 상호작용을 거치고 변화하면서 유기물질, DNA 구조를 이루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각종 생명체들이 출현합니다. 그 모든 생명체들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스스로 변하여 가고, 각종 문명과 문화를 꽃피웁니다.
생명현상의 본질은 우주에서 새로운 형태의 정보를 창출하는 것입니다. 우주에서 정보의 발현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들이 무수한 상호작용을 하면서 우주의 새로운 정보를 창출합니다.
괴겁(壞劫) 100억년은 생겨난 모든 생명체, 모든 자연환경들이 소멸해가는 시기입니다. 우주는 괴겁을 거쳐서 다시 공 상태로 돌아갑니다. 공(空) 상태는 탈 물질적이고 탈 시공적인 상태입니다. 물질과 시공을 벗어난 아뢰야식에 우주 삼라만상의 정보가 축적되어 있는 잠재적인 함장(含藏)의 상태입니다. 현대 용어로 말하자면 모든 생명체, 행성, 항성, 은하, 물질, 공간이 괴멸하여 없어지는 시기입니다. 우주가 다시 수축하여 빅뱅 이전의 물질도 없고 시공간조차 없는(void) 상태로 돌아가는 시기일 것입니다.
우주 대순환 과정으로 생명 그 자체인 우주 전체 집합은 그 일원인 모든 생명체들의 상호작용 현상을 통하여 새로운 정보를 창조하고 그 정보들이 축적되어서 새로운 우주로 재구성(reformation)합니다. 우주 전체 그 자체가 살아있는 생명현상이고 생명현상은 바로 정보현상입니다.
(2) 탈 물질적, 탈 시공적인 우주 정보저장매체의 필연성
우주의 생명현상은 저장된 정보에 의하여 생명체가 발현되고, 그 생명체들 서로의 상호작용으로 새로운 정보가 창출되고, 새로운 정보가 저장되는 일련의 현상입니다. 이렇게 서로 얽힌 인드라망 속에서 상호작용에 의하여 저장되어 있는 정보가 발현되고 변화하고 다시 저장되는 현상을 불교의 용어로는 인과연기(因果緣起)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당연하게 다가오는 간단한 질문과 마주치게 됩니다. 그러면 우주의 정보가 저장되는 정보저장매체(information storage medium)는 어떤 것인가?
정보를 저장하는 매체로서 당연히 생각나는 것은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물질적 정보저장매체들입니다.
생명체의 발현과 진화에 관련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정보저장매체는 화학물질을 재료로 하는 DNA일 것입니다. 처음에 소립자들이 생겨나고 물리법칙에 따라서 상호작용을 하여 여러 원소들의 원자들을 형성합니다. 그 원자들이 물리법칙에 따라서 결합하여 무기물질 유기물질 등 다양한 화학 물질들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그런 화학 물질들을 재료로 하여 DNA라는 정보를 담는 물질구조 즉 정보저장매체를 형성합니다. DNA정보의 발현으로 단세포를 이루고, 그 다음에 다세포 생명체 식물 동물 등으로 변화하여 갑니다. 그리고 그 생명체들의 활동에 의한 새로운 정보가 DNA 변형으로 다시 저장됩니다.
다음으로 실로 경이적인 정보저장매체는 동물들의 뇌입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의 뇌는 약 1000억 개의 신경세포가 약 100조 개의 접속을 통하여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를 합니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정보저장매체이자 정보처리기능을 갖고 있는 물체입니다.
또 다른 정보저장매체로는 지구상의 우리 인류 호모사피엔스가 만들어낸 정보저장매체들입니다. 종이와 인쇄 물질로 만들어진 책들, 자성 물질로 만들어진 메모리, 유리 재질의 CD, 실리콘 물질로 만들어진 반도체 메모리소자 등일 것입니다. 우리들 문명의 유용한 정보저장매체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예를 든 정보저장매체는 자연적인 것이든 인공적인 것이든 모두 물질로 형성된 물질적 정보저장매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심각한 문제점이 생깁니다. 우주의 괴겁(壞劫)에 우주 삼라만상을 이룬 물질적 구조가 파괴되고, 물질 및 시공 자체까지도 소멸한다면 수십 억 년의 그 오랜 기간 동안 생명체들의 활동을 통하여 DNA, 뇌, 인공 저장매체, 문명, 문화에 축적된 정보들이 남아있을 방법이 없습니다. 물질적 구조에 저장된 모든 정보가 소멸되고 맙니다.
실제로 현재 우주는 공간이 팽창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종국에는 초기 우주의 물질 총량에 따라서 빅뱅 지점으로 다시 수축하게 되거나 또는 아주 팽창해버리게 됩니다. 빅뱅 지점으로 수축을 하는 경우에 물질 구조와 시공 자체가 소멸할 것입니다. 계속 팽창해버리는 경우에도 물질의 밀도가 한없이 희박해져서 어떠한 물질의 구조도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즉 어떤 경우에도 물질을 저장매체로 하여 저장된 정보는 모두 소멸하게 됩니다.
(저는 ‘성주괴공(成住壞空) 우주의 정보 창조와 재구성(글1)’에서 우주가 팽창 후에 다시 수축하는 우주 대순환이 더 합리적이라는 추론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수십 억년이라는 장구한 시간 동안 생명체들이 탄생하고 활동하며 만들어낸 모든 새로운 정보들이 없어집니다. 그 모든 우주 생명 종족들의 역사가 그 모든 활동이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즉 유구한 세월을 거쳐서 우주 전체의 모든 생명체들에 의하여 창조되어 물질 정보저장매체에 축적되었던 정보들이 다음 번 주기에 탄생하는 우주의 재구성에 전달되고 기여할 방법이 전혀 없게 됩니다.
우주 전체의 물질적 소멸은 잠시 접어두고 조금 작은 스케일로 우리 태양계의 운명을 생각해봅시다. 우리 태양도 탄생 이후로부터 내부 물질을 핵융합과정으로 소모하면서 변화해가다 결국은 그 활동을 그치게 됩니다. 그 태양 생멸의 과정에서 지금으로부터 10억년쯤이 지나면 태양의 복사량이 확장되고 그로 인하여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소멸합니다. 그 후 대략 60억년이 더 지나면 태양의 외곽 층이 확대되면서 지구상에 꽃 폈던 모든 생명체들 삼엽충, 공룡, 잠자리, 은행나무, 호모사피엔스 등등의 기반이 된 유전자 정보들은 물론 그들이 이룬 문명의 흔적이 통째로 소멸됩니다.
지구상에서 모든 생명체들이 창출하고 물질적 정보저장매체에 저장한 정보들이 모두 초기화(reset) 되어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지구가 불타기 전에 지구를 탈출하여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종족과 문명이 있다면 그들이 축적한 정보들은 지구의 소멸과 함께 없어지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종국에는 전 우주의 물질과 시공 자체가 소멸되는 상태에서는 전 우주의 어떤 물질적 생명체 종족이라도, 그리고 그들이 물질적 정보저장매체에 저장한 어떠한 정보들이라도 모두 소멸되고야 맙니다.
만약 그렇다면 전체 우주의 경이롭기 그지없는 무수한 생명체들이 생멸을 겪으며 수십 억년을 넘어서 활동하고 변화하며 이루는 것들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도대체 얼마나 무지막지한 우주적 낭비인가요? 과연 전체 우주가 그렇게 무모하게 뜻도 없이 낭비를 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보다는 오히려 우주의 물질과 시공자체가 소멸하더라도 우주삼라만상의 정보를 유지할 수 있는 정보저장매체를 가정하는 편이 더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우주의 탈 물질적, 탈 시공적 정보저장매체의 필연성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불교의 명상가들이 깊은 삼매 체험으로 알아낸 것을 정리한 유식론에서 설명하는 아뢰야식(함장식)이 바로 이러한 탈 물질적, 탈 시공적 정보저장매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3) 탈 물질적, 탈 시공적 정보저장매체의 실재 가능성
현재 우주의 수백 억년에 걸친 생명현상 활동이 완전히 무의미하게 끝이 나지 않으려면 전 우주의 물질과 시공이 소멸하는 과정에도 불구하고 우주 삼라만상의 정보들이 저장되어 보존될 수 있는 탈 물질적, 탈 시공적 정보저장의 방법이 있어야만 합니다. 탈 물질적 탈 시공적 정보저장매체의 존재가 필연적입니다.
그런데 과연 탈 물질적 탈 시공적인 정보저장매체가 실재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과연 그러한 정보저장매체의 실존 가능성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까요? 저는 탈 물질적, 탈 시간적 정보저장의 방법 또는 매체가 실제로 존재할 가능성의 근거를 다음과 같은 물리학적 사실로부터 제안해 봅니다.
현 우주의 초기 빅뱅시점 이전에는 물질도 없고 시공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한 탈 물리적, 탈 시공적인 상태에서 소립자들이 정확한 원리에 따라서 생겨납니다. 그리고 생겨난 소립자들은 어김없이 정확하게 원리를 따라서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물질세계를 형성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겨난 물질이 따르는 법칙은 현 우주가 빅뱅으로 생기는 과정의 시초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주 물리적 진행과정을 설명할 때 물질이 우연히 스스로 생겨나고 그 물질이 점점 발달해 가면서 스스로의 원리 즉 물리법칙들을 만들어 갔다고 하는 것보다는 정확한 원리에 따라서 물질이 없는 상태에서 물질이 생성되었고, 생성된 물질들 역시 정확히 정하여진 원리들에 따라서 물질세계를 형성해 갔다고 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고 합리적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면 물질과 시공이 있기도 전에 있는 원리 또는 법칙이란 것은 무엇인가?
원리 또는 법칙을 간단히 정의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 때 그 현상이 따르는 과정의 매뉴얼 코드(process manual code)입니다. 그리고 과정 매뉴얼 코드라는 것은 나열된 정보(information)들의 집합입니다. 따라서 물질과 시공이 있기도 전에 물질들이 생기는 과정과 생긴 후에 따라야 하는 우주의 원리 정보가 어딘가에 코딩(coding)이 되어 저장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결론입니다. 요즘 컴퓨터 기술분야에서 어떤 과정이 따라야 하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짜는 것을 정보를 코딩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정보저장매체에 원리 또는 법칙 정보를 저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주의 정보가 물질도 있기 전에 시공도 있기 전에 도대체 어떻게 저장되어 있을 수 있는가? 물질과 시공을 벗어난 탈 물질적, 탈 시공적 우주 정보저장매체가 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적 우주가 있기 전에 우주 삼라만상의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는 불교의 아뢰야식(함장식)과 일맥 상통하는 측면이 그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아뢰야식을 언급할 때는 생명체의 의식작용과 연관을 지어 생각합니다. 생명체의 뇌들이 집단적으로 존재하며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상태에서 각 객체의 자아의식 밑에 존재하는 탈 자아적인 깊은 집단 잠재의식을 제 8 아뢰야식이라 말합니다. 이는 생명체들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그들의 의식과 관련한 인식론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제가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들이 완전히 소멸하여 그들 객체의 뇌를 통한 의식작용이 일체 사라지고 나서 또한, 그 모든 생명체들이 활동했던 우주의 물질과 시공 자체마저 없어진 후에도 우주의 정보를 저장하는 탈 물질적, 탈 시공적 정보저장매체로서의 아뢰야식의 실존 가능성입니다.
저의 논지를 다시 요약하면 저는 그러한 정보매체의 실존 가능성의 근거를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찾습니다.
[우주 빅뱅 이전의 물질과 시공이 없는(void) 상태로부터 물질과 시공이 생겨날 때 그 물리적 탄생과정을 이미 정확한 원리 정보(principle information)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즉, 이것은 물질과 시공이 있기 전에 원리 정보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시공과 물질이 있기 전에 원리 정보가 있다는 것은 탈 시공적, 탈 물질적 정보저장의 방법 또는 매체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현재도 아원자(subatomic) 세계에서는 순간순간 입자와 반입자들이 생멸한다. 그때 아주 정확하게 법칙을 따라서 생멸한다. 절대로 제멋대로 규칙이 없이 생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 또한 물질이 있기 전에 물질이 생기는 과정을 지배하는 원리 정보가 있다는 증거이다.]
우주가 탄생하고 물질세계를 형성해온 원리 정보들은 우리 지구상의 호모사피엔스들이 극히 최근까지 개발한 매우 어려운 수학적 물리학적 개념과 이론 및 실험을 동원하여 찾아가고 있는 난해한 정보들입니다. 우리 인류가 이제 가까스로 조금 이해하기 시작한 그러한 난해한 원리 정보들이 40억 살의 지구행성이 생기기도 훨씬 전 까마득한 옛날에, 그러니까 현재부터 138억년 전 빅뱅 원시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직시해야 합니다. 그 원시상태부터 고도의 난해한 우주의 원리 정보가 존재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를 파고들어야 합니다.
탈 물질적, 탈 시공적 정보저장매체(어쩌면 제 8 아뢰야식)의 구체적인 연구는 참으로 광활하고 흥미진진할 것입니다.
(2014. 11. 11)
지월 이재웅, 공학박사 <묘하고 묘합니다> 마인드랩 2015 pp.11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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