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mpeer칼럼

맞는 자리

lampeer 2020. 7. 21. 17:51

 맞는 자리

 

 도가의 지향은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의 제목에 드러나 있으며, 도덕은 노자에게서 ‘사람은 지상의 법을 따르고 지상법은 하늘법을 따르며 하늘법은 도리를 따르며 도리는 자연을 따른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는 말 속에 무위한 자연(無爲自然)을 지향한다. 따라서 도덕(道德)을 보는 관점은 <도덕경> 하편에 ‘도(道)는 만물을 낳고 덕(德)은 만물을 기른다(道生之 德蓄之)…… 이렇게 낳고 기르면서도 소유하거나 지배하지 않으므로 현덕이라 한다(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에 잘 나타나 있다.

 도덕의 위치는 ‘도(道)를 잃은 후에 덕(德)이 있고 덕을 잃은 후에 인(仁)이 있으며 인을 잃은 후에 의(義)가 있고 의를 잃은 후에 예(禮)가 있다.’ 고 하여 도덕인의예(道德仁義禮)에서 도(道)를 가장 높이 두었는데, 이하로 갈수록 인위(人爲)가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예를 지키되 받아들여 지지 않으면 바로 화를 내는 것’을 그 예로 들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추구하는 유학(儒學)에 대한 도학(道學)의 우위를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공자의 ‘생이지지(生而知之)’처럼 성인에게는 무위자연으로 자연스럽겠으나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인의예지의 수양이 필요하다.

 '선한 이도 선하게 대하고 악한 이도 선하게 대한다(善者吾善之 不善者吾亦善之)’는 <도덕경>의 가르침은 성인의 도리로는 그러하나,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악한 이가 미치는 사회악을 무위(無爲)로 선하게만 대처할 수 없다. <도덕경> 스스로도 ‘큰 원한을 지닌 사람은 서로 화해시켜도 반드시 원한이 남는다(和大怨 必有餘怨).’ 고 하고 이를 뛰어 넘는 사람으로 성인을 든다. 그 결과 ‘하늘은 친함이 없이 언제나 선한 사람과 함께한다. (天道無親 常與善人)’ 고 하였다. 무위자연한 도덕의 엄연함은 ‘도에 어긋나는 일은 곧 그친다(不道早已)’ 고 경고도 한다. <장자(莊子)>의 작은 참새는 거대한 붕새를 알지 못한다거나, 너무 크고 쓸모없는 가죽나무는 큰 그늘이 된다거나, 큰 표주박은 배로 쓸 수 있다거나가 원칙적으로는 훌륭하다. 우주 지구라는 자연으로부터 온 모든 것이 갖는 본질적인 절대평등성, 그로부터 무용에서조차 유용성을 찾는 점이 그러하다.

그러나 도가의 철학은 ‘항상 아무 것도 아니하면서 하지 못하는 일이 없는(道常無爲 而無不爲)’ ‘현허지도(玄虛之道)’로 이상은 높고 뜻은 깊지만, 수행(修行) 수도(修道)의 표준으로 삼기에는 너무 수동적이고 허황하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可道)’와 같이, 깊이 보면 모두가 이미 실상 그대로 무위자연상태라 할 수도 있겠으나, 도학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 시절의 성인의 학(學)이지 만인의 학이 아니다. 함부로 따라하면 민중을 호도하게 된다. 한 때 민중의 지도자였던 이들이 애매한 언어구사로 민중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그러한 예이다. 언어는 시대와 사람을 따라 공감이 있을 때 소통이 가능하고 유용하다. ‘예’와 ‘아니오’와 ‘침묵’이 각각 맞는 자리가 있으며, 함부로 섞는 부작용은 전체를 위험에 빠트린다.

 인류의 진화는 결국 생명체, 생명현상의 알려는 마음, 바른 방향, 부단한 추구에 있지, 무위, 무용지물, 피동의 초월에 있지 않다. 그것이 설령 ‘하나의 활동하는 전체, 전체성을 뜻하는 의미의 무위(無爲)’로서, 무위로서 안다거나 전체가 안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현상은 결국 낱낱의 현상과 생명, 생명체의 아는 기능, 생명 활동에 의해서 비로소 드러나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성인도 되고 범인도 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날마다 사람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이다.

lampeer(2020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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