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와 민중들의 역사 인식
이재웅*
어떤 그룹이나 경영자의 성품이나 사상은 그 그룹의 현재 행복과 미래 희망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더욱이 국가 경영자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요즘 우리 사회는 우리의 지도자로 내세운 대통령과 국회위원들 일부로 인한 공업(共業)의 죄값을 온 국민이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지도자의 최우선 기준 덕목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지도자를 정확하게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핵심적으로 중요한가를 요즘처럼 민중들이 날마다 온 몸으로 절감한 적이 없을 것이다. 우리 민중이 역사와 사회의 주체임을 뚜렷하게 자각하지 못하고 역사를 잊은 어리석은 행동들을 어설프게 이어옴으로써 현재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작금의 상황을 고려할 때, 단재 신채호 선생의 성품과 사상이 유난히 마음에 다가온다.
이에 단재 신채호의 역사에 대한 인식과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 세개의 어록과 관련하여 견해를 서술한다.
(1)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신채호의 명언이다. 요즘 우리가 깊이 새기며 반성해야 할 구절이다. 역사를 잊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잊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잊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한 특강에서,
“단재 신채호는 우리 민족 수 천년 역사속에 가장 애석한 사건을 고려조 묘청의 난이 실패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 현대 역사에서 가장 애석한 사건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해체한 사건입니다.”라고 하였다.
정곡을 찌르는 깊은 지적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암울한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서 현대를 열어가는 역사의 길목에서 친일의 역사를 바르게 청산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이렇게 바르지 못하고 힘들게 옥죄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중요한 시기에 사심에 가득차서 대통령이란 권력욕에 빠진 이승만과 반민족적 친일행위를 덮어버리고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려는 세력들이 파렴치하게 결탁하였다. 그 세력들은 친일 행적을 덮는 것을 넘어서 뻔뻔하게도 친미 반공의 가면을 쓰고 또다시 지배세력으로 행세하기 위하여 거짓과 더러운 음모로 역사를 속이고 왜곡하는 만행을 이어왔다. 그러한 역사의 왜곡 속에서 우리 민중들마저 강제 반, 자의 반으로 역사를 잊은 죄과를 요즘 혹독하게 받고 있다. 이렇게까지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당하고 나서 그래도 다행히 이제 민중적 자각이 광범위하게 자리잡아 가고 있다. 그것이 ‘시민 촛불혁명’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번에는 반드시 철저하게 역사를 잊지않고 끝까지 관철시켜야 하겠다. 자각한 많은 민중들의 건전하고 일반적인 상식에 비추어서 부당하지 않다고 명확하게 수긍이 될 때까지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의 건전한 미래가 확보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기를 간절하게 희망한다.
(2)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다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다.’
인간의 그룹간, 민족간, 국가 간의 상호작용으로 발생하는 역사의 흐름에 대한 신채호의 인식을 잘 말해주고 있는 어록이다. 비단 인간만이 아니라 뭇 생명체들 상호작용의 핵심적인 한 측면에 대한 통찰이다. 물론 ‘투쟁’이 아닌 또 다른 측면이 있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의할 사항은 아니다.
그러면 아(我)와 비아(非我)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복잡하고 정교한 이론의 전개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본인의 견해는 아주 단순하다. 아(我)란 시간속의 어떤 시점에서 생명 개체인 ‘나’라는 존재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함께 행동하는 그룹을 아(我)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비아(非我)란 아(我)와 다른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이유로 아(我)와 갈등관계에 있는 그룹으로 정의된다. 아(我)와 비아(非我)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간 속에서 상황이 전개되어 감에 따라서 유동적으로 변하여 간다. 몇가지 예를 들면 그 뜻이 선명해진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하에서는 그 식민지 상황을 종식 시키려고 행동하는 모든 그룹과 그 식민지 상황을 지속시키려고 행동하는 모든 그룹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갈등관계이다. 해방이후 공간에서 정부를 수립하는 상황에 있어서는 남북 단일정부를 수립하려고 행동하는 그룹과 남의 정부, 북의 정부를 단독으로 설립하려고 행동하는 그룹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갈등관계이다. 현재의 절실한 예를 들자면 세월호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그룹과 세월호 사건의 진실을 덮으려는 그룹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갈등관계이다. 이렇게 아(我)와 비아(非我)를 정의하고 나면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수학의 공리와 같이 합리적인 공리가 된다. 즉, 역사의 흐름이라는 것이 아(我)와 비아(非我) 갈등관계의 기승전결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며 변화하여 가는 과정인 것이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이 특강에서 김삼웅 전 관장은 의로울 의(義) 자를 양(羊)과 손 수(手)와 창 과(戈)로 파자(破字)하여 설명하였다.
“의(義)라는 것은 창을 손으로 들고 양을 지키는 것이다. 의롭다는 것은 부당하게 자기 것을 착취하려고 하는 자들에게 맞서서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다.”
의(義)에 대한 인상적인 정의(定義)이다. 요즘 부당함에 맞서서 거리로 나오는 민중들이 마음에 살펴볼 점이다. 어떻게 하면 의로울 수 있겠는가? 두가지 성품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양심적일 것’과 ‘용감할 것’이 그것이다.
본인이 다니던 고등학교의 교훈은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었다. 참 자랑스럽게 생각한 교훈이었다. 그러나 40세쯤 접어들 무렵부터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양심이 있어도 그것을 지키려면 용감해야 함이 절실할 때가 많다. 본인이 다닌 고등학교와 경쟁적이었던 학교로 본인과 친했던 중학교 동창이 다닌 학교가 있다. 그 학교의 교훈은 ‘용감하여라’ 라고 들은 기억이 있다. 두 학교의 교훈을 합친 교훈이면 정말 훌륭하겠다는 생각이 깊게 든다.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다. 그에 용감하여라!’
(3) 우리 스스로의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모아 감이 어떨까요
신채호 선생의 역사적 자주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어록에 대하여 고찰한다.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한국이 되니,
이 것이 어쩐 일이냐!
이 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 것은 바로 노예정신이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 거든 역사를 바로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 거든 역사를 읽혀 바로 알게 할 것이다.’
마음에 공명을 일으키는 글이다. 생명체의 본원적인 특성 그 자체가 자주적인 것이다. 우리집 강아지가 옆집 강아지를 따르기 위해서 태어났겠는가? 이 동네 은행 나무가 저 동네 은행나무를 따르기 위해서 자라나겠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우리 집 강아지는 우리집 강아지로서 태어났고, 이 동네 은행나무는 이 동네 은행나무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무릇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다 그렇다. 답은 너무도 명확하다. 생명체의 확실한 본질은 스스로 살아가는 자주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본인의 졸저 <묘하고 묘합니다. 어느 이공학자의 구도 보고서 1>에 실린 글 ‘우리 스스로의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모아 감이 어떨까요’의 끝 몇 구절을 적는다.
‘청년기에 읽은 카톨릭 서적 <종교박람회>란 책 속의 한 구절이 지금도 여전히 마음에서 메아리 칩니다.
“너희들 스스로 나(예수)와 같은 독수리들인데 스스로가 병아리처럼 생각하여 독수리처럼 날 생각을 못하는구나”
미래 천 년을 향하여 우리 스스로의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모아 감이 어떨까요?’
우리 모두가 생명 개체로서 삶의 자주적 주체임을 자각하고 자신 스스로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지당하다. 각 민족들이 그들 스스로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노래를 따라 부르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할 것이 아니다. 우리 시대 우리 스스로의 노래를 만들어 가고 부르는 것이 지당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우상화의 도그마에 빠지기 쉬운 종교인들이 이점을 특히 주의해야 한다. 우리 대부분이 비록 많이 작고 모자라더라도 공자, 싯다르타, 예수, 수운(水雲)이 그들의 시대에 그들의 노래를 부르고 우리에게 전달하였듯이 우리도 우리시대 우리의 노래를 부르고 그것을 미래의 후손들에게 전달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합당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우리 민중들 모두가 생명 개체로서 삶의 주인임을 뚜렷하게 자각하는 것이 가장 핵심이다. 그 바탕 위에 민중들이 사회와 역사적 흐름의 주체임을 견고하게 자각하고 그 자각에 입각하여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 역사의 대양을 항해하는 우리 사회, 우리 국가, 우리 민족이라는 배가 바른 방향으로 좌초없이 저 멀리 항해하여 나갈 것이다. 그래야 아직 인류가 이르러 보지 못한 인류의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나서는 미래로의 희망의 대열에 합류하여 함께 전진하여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 공학박사. <묘하고 묘합니다. 어느 이공학자의 구도 보고서 1> 마인드랩, 2015. 7. 30 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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