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깨달음의 용도를 돌아보고 반성함
마음공부, 깨달음의 용도를 돌아보고 반성함
마음공부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척도는 바른 견해와 바른 견해의 실천일 것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참선을 열심히 하여 어떤 경지를 이루었다 한들 모든 생명체, 모든 존재를 위하여, 자신과 타인을 위하여, 우리가 모여 사는 사회를 위하여, 바른 견해가 뚜렷하지 못하다면, 그러한 바른 견해를 실제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그 마음공부와 그를 통한 깨달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를 들겠습니다. 몇 달 전에 조계종단에서 한 스님이 대낮에 서울 도심 한복판 조계사에서 여러 중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서 지하 방에서 폭행을 당한 황당하고 한심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불자이든 아니든 사회의 일반 대중들이 이해를 할 수가 없고 걱정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자비를 근본으로 하는 종교 집단에서 어떤 이유로든 분명히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그런데도 승단에서 아주 높이 존경 받는, 높이 깨달았다는 승단의 어떤 고승들로부터도 그 일의 잘못됨을, 승단의 잘못됨을 사회적으로 공개적으로 통렬하고 분명하게 지적하고 실제적으로 나서서 준엄한 문책을 가하여 그 잘못됨을 확실하게 바로 잡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대신 회개한다.”는 손 쉬운 한마디로 그냥 유야무야 덮고 맙니다. 내가 대신 회개해서 무슨 변화가 있는 것입니까? 승단의 폭행사건도 그렇고, 승단의 도박사건도 그렇고, 승단 선거의 타락상도 그렇고 그저 유야무야 덮습니다. 그래야 마음공부를 훌륭히 하여 마음이 넓고 화쟁의 정신이 큰 것처럼.
이러한 지경으로 인하여 높고 깊게 깨달았다는 스님들과 그 스님들의 깨달음에 큰 실망감과 큰 회의가 이는 것이 순진하고 미련한 불자들의 어리석음인지요?
누군가 말했지요. “행동하지 않는 지성은 진정한 지성이 아니다.” 하물며 깨달음에 있어서 그것을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상식적인 일반 대중들의 눈에는 집단 이기주의요 이해관계를 생각하여 서로 적당히 눈 감고 봐 주는 정치적 행동들로 보이는 것이 과연 어리석은 대중들의 잘못된 시각인지요? 불자가 아닌 점잖고 상식적인 사람들은 그냥 조용히 혀를 차며 웃더군요.
일반 불자 대중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고 상심해서 조심스럽게 잘못들을 지적하고 시비를 하면 그것을 즉시 받아들이고, 즉시 고칠 생각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크게 대승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어리석어서 종단을 해롭게 하는 해종 행위를 한다는 분위기로 덮어갑니다.
도대체 해종(害宗) 행위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가요?
다른 종교는 더 심한 데도 일사불란하여 밖으로 표출되지 않는 것뿐인데 오히려 좀 억울한 면이 있다는 참으로 딱한 변명을 늘어 놓는 스님들도 있습니다. 도무지 집단 논리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집단의 모습이 객관적으로 어떠한 모습인지를 똑바로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인 듯도 합니다.
그러니 종단에서 내세우고 가르치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고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지 깊게 반문하게 됩니다. 바른 견해를 또렷이 공개적으로 밝히고 바른 견해 대로 곧이 곧 대로 행동을 하지 않거나 또는 차마 못하는 깨달음이라? 바른 견해 대로 주위를 이끌지 않는, 또는 이끌지 못하는 깨달음과 법력이라?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대단하고 어디에 소용이 닿는 것인가요?
통렬하게 되짚어 보고 철저히 부수고 새로 세우는 개혁을 해야 할 시기라 생각됩니다. 더 미룰 수조차 없는 벼랑 끝 같은 상황인데도 그 기회마저 놓치면서 망가지고 힘이 빠진 현재의 상황을 서로의 이해타산으로 연장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매우 걱정이 됩니다.
출가자, 재가자 모든 불자들이 정성으로 추구하는 마음공부와 깨달음! 그 뜻과 그 용도를 출가자, 재가자 모든 불자들이 진짜 솔직하게 반성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제 자신부터!
(2014. 2. 18)
지월 이재웅<묘하고 묘합니다 어느 이공학자의 구도보고서1>'4장. 오늘 일을 묻습니다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