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대로 솔직하게 소리지르고 물어봄!
생각대로 솔직하게 소리지르고 물어봄!
속이 뒤틀 듯 안타까움이 깊게 맴돌아 다시 소리를 지르고 물어봅니다. 잘못됨이 있어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유야무야 넘기는 것. 그것은 죽은 수행의 모습입니다. 바른 견해 없이 하는 수행의 결과라 생각됩니다.
‘적절한 인연 시절을 기다린다.’ 과연 맞는 구실일까요? ‘포용하는 마음이다.’ 명확한 잘못은 고치고 나서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포용 아닐까요? 잘못이 있으면 정확히 시비하고 정확하게 문제점을 고친 후에 서로 명확히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진정한 포용이 이루어집니다. 특히 개인이 아니고 집단이 관련한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최근의 예를 들겠습니다. 세계적으로 추모하는 넬슨 만델라를 봅시다. 잘못된 것에 대하여 정확하게 시비를 가려 공개적으로 명확히 밝히고 문제점을 고친 후에 그것을 바탕으로 서로 명확히 인정하고 크게 용서하고 포용함으로써 오랜 갈등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공명정대함을 바탕으로 한 진정한 화쟁의 길이 아닐지요?
잘못이 있어도 유야무야 덮고 넘기는 것은 마음의 폭이 넓은 것도 아니요 진정한 화쟁의 길일 수도 없습니다. 문제의 원인과 갈등이 가라앉아 있다가 시절인연이 맞으면 언제고 다시 불거집니다. 바른 길을 찾는 구도집단, 수행자들이라면 두말할 것이 없이 자신들의 허물에 대한 잣대가 남의 허물에 대한 잣대보다 매우 엄격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들의 허물이 확실한
데도 확실하게 고치는 모습은 없고 판에 박힌 듯 반복해온 덕담으로 대중들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살아라.” 내용으로는 도덕
교과서 같은 덕담입니다.
그런데 요즘 많은 대중들이 그러한 덕담에도 회의를 느끼고 반발감마저
느끼는 것은 왜 일까요? 수행자들이 반복하여 실제로 보여주는 모순된 모습과 행동들 때문입니다. 대중들에게는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고 행동을 바르게 하라고 늘 덕담들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욕심과 집착, 매우 크게 잘못된 점들에 대해서는 실제로
크게 소리쳐 지적하고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고치려는 모습이 없습니다. 대중들 눈의 티끌은 빼라고 늘 읊조리고 가르치면서 승단 자신들 눈의 대들보는 그럭저럭
참고 잘 넘깁니다.
스님들의 한심스러운 잘못된 일이 사회적으로 알려지면 어떤 스님들은 재빠르게 매스컴 앞에서 108배 참회를 하는 포퍼먼스를 벌입니다. 그 뉴스 장면을 보면서 누가 이렇게 제게 묻더군요.
“108 참회라는 것이 하루에 108번 절하는 것이 일반인이 하기 어려운 그렇게 대단한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라고 부끄러움에 대답을 하니 다시 이렇게 덧붙이더군요.
“제가 보기엔 아무래도 진짜 부끄럽지 들 않은 것 같습니다. 플래시 라이트 받아가며 참회를 하는 것을 보니… 진짜 부끄러우면 아마도 혼자서 아무도 모르게 참회하는 것 아닌지요?” 흔한 일반 대중들의 생각입니다. 일반 대중들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진짜 부끄러우면 그런 식의 보이는 알량한 참회의 행동은 스스로의 자존감 때문에라도 차마 하지 못합니다.
사회의 상식적인 일반 대중들이 납득할 수가 없는 황당한 집단 린치 폭행사건이 승단에서 생겨도 그럭저럭 흐지부지 덮고 맙니다. 승단의 지도자들, 바로 잡을 만한 힘이 있고 위치에 있는 분들이 피를 토하며 사자후를 하고, 후학들을 위하여 반드시 당장 바로 잡아 놓고야 말겠다는 실질적인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서로서로 예의(?)를 지켜가며 적당히 완만히 넘어갑니다.
또 이런 일이 있습니다. 수행 승들의 도박사건이 크게 터져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일반 대중들이 특히 불자 대중들이 몹시 아파하고 당혹해 하고 있을 무렵, 오히려 승단의 큰 분이란 스님이 나와서 스님들에게 꿋꿋하게 초파일 연등행사를 치르라고 격려하는 것을 매스컴에서 보고는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이 있습니다.’꿋꿋하게 하라니? 무슨 대의를 위해서 의로운 투쟁이라도 하다가 사회적 핍박을 받았단 것인가?’ 도무지 사회 상식에 준하는 객관적인 시비 분별, 자기성찰,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집단 이익에 맞추어진 최면에라도 걸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머리를 흔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당연히 불자 모두 자숙하라고 말씀할 줄 알았습니다.
제가 아는 진지한 불자에게 하소연하며 물어보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꿋꿋하게 연등행사를 하라고 격려하는 종단 어른 스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느냐?”고. 그 불자는 냉소적으로 웃으면서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그것을 왜 이해 못합니까? 연등행사가 얼마나 큰 돈 행사인데 그 행사를 꿋꿋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가 죽어서야 되겠습니까?”
아마도 그 이도 무엇인가 마음이 편치 않아 뒤틀린 듯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 힘들어 하는 여러 대중들은 종교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여 미련하게 힘들어 하는 것인가요?
대다수의 젊은 수행자들도 젊은 의기로 잘못된 점을 진짜로 바로 잡아 보려고 하기보다는 집단적 분위기 집단적 위계 질서 문파 문중의 뜻에 고개 숙이고 젖어 들어가는 모습입니다. 굉장한 위계 질서입니다. 하긴 절에 가보면, 행자시절부터 하심(下心)을 배우게 한다는 교육방법에 의하여, 젊은이들이 노비 머슴처럼 머리 숙이고 복종하고 부림 당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익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 대부분 절 집에서 문파, 문중의 뜻에 고개 숙이는 것은 자연스럽게 배인 습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가을 언제인가 차를 타고 가평을 가는 중에 창가로 지나치는 사찰을 바라보면서 불자가 아닌 또 한 명의 동료가 제게 진지하게 묻더군요.
“가만히 보면 불교에서는 자신이 속한 절과 문파가 최우선인 듯한데 도대체 부모도 형제도 놓아두고 떠난 출가자들이 자신이 속한 절과 문파가 왜 그리 중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자연적인 자기 집의 구속을 벗고 떠나서 모순되게도 모여서 만들어진 집단 문파 문중 더 큰 집에 더욱 구속되어 버린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출가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저는 종교에 대하여 비교적 자유롭고 편견은 없지만 그래도 분명히 불자인고로 합리적인 답이 생각났으면 옹호를 했겠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속에서 정확히 답할 말이 없고 그래서 가만히 있었습니다.
또 이런 일이 있습니다. 참 믿고 싶은 알려진 수행 승들이 나선 일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몸을 바꿀 생각으로 잘못된 점을 고치겠다.” 선언을 하고 나섰습니다.‘몸을 바꾼다’는 것은 수행으로 법력이 높아서 몸뚱아리 죽음에 집착하지 않고 스스로의 뜻에 의하여 죽음을 넘어가는 대단한 경지에서 가능한 행동입니다. 그러니 많은 일반 대중들로서는 이제야 제대로 되는구나 하고 참으로 기대를 하고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매일 잘 되기를 기원하였습니다.
그런데 '단식'이라고 적힌 팻말을 가슴에 명찰처럼 걸고 앉아 있는 우스꽝스러운 스님들 모습이 뉴스에 나오더군요. 그리곤 매스컴 앞에서 며칠 시위를 하고 앉아 있다가 이제는 할 만큼 했다고 은근 슬쩍 돌아갑니다. 단 한 분도 몸을 바꾸지도 않았고 몸을 바꾸려는 절절한 모습도 없었습니다. 물론 이렇다 하게 잘못이 바로 잡힌 것도 없었습니다.
그 무렵 수행 승들이 시위를 하는 모습을 같이 뉴스로 보던 두 명의 동료가 이렇게 말하며 웃더군요. 그 동료들은 불자는 아닙니다.
“몸 바꿀 생각이라면서요? 그러면 조용히 단식하는 것이지, 나 단식하고 있다고 목에 팻말을 걸고 있는 것을 보니 도인이 아니라 유치한 것 같습니다. 수준을 보니 아마도 얼마 못 버티겠는데요.”
딱해 보이고 낯이 많이 뜨거워지더군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확히 그 동료들의 예상대로 되었습니다.
“이제는 수행 승으로서 산에 돌아가서 잘못하는지 준엄히 지켜보겠다.”고 또 엄중한 선언을 하며 주섬주섬 돌아가는 모습이 매스컴을 탑니다.
정확하게 씁쓸함만이 맴돌더군요. 마음 구석에서 올라오는 소리에 숨김없이 귀를 기울이자면 이렇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문파 문중의 득실에 따라서, 적당히 시위하고 적당히 목소리 내고 적당히 참회하는 정치적 행태! 이것은 수행 승들의 정치적 행태인데 그것도 모르고 진짜로 기대를 했구나!
그렇게 밖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몸을 바꿀 각오”라는 일반인들로서는 감히 언급조차 할 수 없는 말씀이나 안 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정직하고 편견 없이 바라보는 대중들의 기준으로는 별로 언행일치도 안되고 깊은 진정성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들을 수행자들이 계속하여 보여주고 맙니다.
법력 높다고 알려진 수행 승들의 말씀과 의기를 너무 단순히 깊게 믿은 어리석은 대중들인가요? 재가 범부가 높은 수행 승들의 높은 뜻을 모르고 견해가 모자란 소치인지요?
이쪽 저쪽 할 것 없이 딱하다는 생각이 드는 모습인데도 스님들은 화쟁이란 융통성으로 그럭저럭 넘겨갑니다. 그러고는 대중을 향해 법담을 한다, ‘힐링’을 한다 하며 여러 행사들을 합니다.
그것도 필요는 하겠지만 우선은 시급하게 시선을 승단 자체로 돌려서 스스로들을 제대로 바르게 ‘힐링’을 해야 할 타임이 아닐지요? 습관적으로 대중들을 가르치려고만 하는 것이 아마도 스승님 증후군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고 느껴집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대중들의 왜곡된 시야 탓인가요?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과 수행을 귀중하게 여기는 재가 불자로서 스님들께 말씀 드립니다. 대중들을 가르치려 들지만 말고 스스로 집단의 논리에서 벗어나서 스스로들의 객관적인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살펴보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스스로 조금만 생각을 할 줄 아는 많은 대중들은 수행 승들의 이러한 모순적이고 안일한 모습에 실망을 느낍니다. 스스로 모순적이고 안일하게 하는 법문 덕담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용적으로는 도덕적인 바른 법문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삐딱하게 “스님들이나 잘들 하세요!” 하는 반발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 대중들이 결코 편협하고 왜곡된 마음씨를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상당히 정직하고 단순한 반응입니다.
구도를 위하여 출가까지 결행한 수행자들입니다. 참 존경스러운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직한 수행자이면 스스로들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돌아 보셨으면 합니다. 쉽게들 스스로를 대중들의 스승님 위치에 놓지 말고 돌아보셨으면 합니다. 대중들에게 무엇인가 좋은 말로 가르치려는 집착에서 벗어나 상황을 객관적으로 돌아 보셨으면 합니다. 집착과 편견 없이 한 발짝 물러서서 스스로들의 모습을 정직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보십시오.
수행의 가치를 높게 여기고, 출가한 수행자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겸손히 받아들이고 배우려는 순수한 대중들이 왜 이리 심하게 실망하고 왜 이리 답답하여 소리지르기를 시작하는지 명확하게 보일 것입니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고쳐야 굉장한 수행력으로 진정으로 주위를 복되게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를 위하여 긍정적인 앞날을 위하여 각자의 처지에서 정직하게 돌아봅시다. 그리고 견해의 모자람은 서로 평등하고 솔직한 견해의 교류를 통하여 함께 배우며 채워갔으면 합니다.
(2014. 3. 5)
지월 이재웅 <묘하고 묘합니다 어느 이공학자의 구도 보고서1> 4장. 오늘 일을 묻습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