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mpeer칼럼

귀신

lampeer 2021. 7. 1. 09:36

귀신

 

영혼들 중에 6도에 윤회하지도 못하고 떠도는 존재를 귀신이라고 한다. 이들이 귀신이 된 것은 어떤 이유로든 지극한 슬픔 내지 미련을 가진 자들이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그렇다고 저승에도 가지 못하고 그저 떠도는 까닭이라 한다. 그래서 슬픔에 예민한 사람들은 그들을 보게 된다. 그들을 두려워하면 그들도 적대감을 느끼고 무서움을 주지만, 지극한 슬픔으로 그들을 보게 되면 무엇인가 바라는 것을 드러내 놓는다고 한다.

 명상을 하면 식(識)이 맑아지는데, 슬픔에 민감한 수행자가 명상 중에, 그러한 심상을 볼 때가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대부분의 선사들은 무념(無念) 무상(無相)의 길로 가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지, 거기에 머무르면, 귀신들의 노예가 된다고 가르친다.

명상은 나 자신을 위한 치유이기도 하며, 전생 기억들은 명상의 목적이 아니라 참선 여행 중에 주어지는 보너스 같은 것이다. 어부가 어망을 바다에 넣으면 한 가지 종류의 고기만 걸리지 않듯이, 과거 현재 미래가 지금 여기서 한바탕 화해를 한다고 할까?

 불교의 가르침 중에 6신통이라는 게 있는데,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탁월한 신통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말한다. 명상 수행 중에 혹은 깊은 집중 상태 중에 식(識)이 맑아져서, 자신의 전생을 보는 이도 있다. 최면술사가 최면술을 써서 피해자로 하여금 사건의 세밀한 디테일을 기억해 내게 하거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치료에 활용하는 것도 깊은 의식의 상태를 물리적으로 유도하는 방법론이다.

 이것들이 객관적 사실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나의 심리 상태를 반영하여 나의 뇌에서 떠오른 정보 심상에 대하여 자기 이해와 해소를 하였다는 점이다. 뇌는 생각보다 훨씬 더 합리적인 장치이다. 내게 나타나는 심상들은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나의 특질과 환경, 문화적 정보들을 배경으로 한다.

자 그렇다면 귀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주파수를 맞추지 않으면 귀신은 나한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슬픔이 귀신의 성품이니, 슬픔 가운데 있으면 그만큼 귀신을 볼 확률이 높아진다. 골목에서 깡패를 만날 때 깡패를 제어하고 깡패들을 교화까지 할 능력이 있으면 그들과 맞닥뜨린다. 그렇지 않다면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 게 상책이다. 산 밑 유원지에서 누군가 만났다고 산꼭대기 등반 장비를 갖추고 유원지에 짐 풀 수는 없지 않은가?

어느 스님에게 귀신은 법계에 속하느냐고 질문한 이가 있었다. 귀신은 감히 법계에 속할 수 없다는 투의 답이 돌아왔다. ‘꿈 깨라’ ‘거나, 무시무시한 대력신에게 걸린다고 겁주는 이도 있다. 귀신을 명명하는 인간의 현상은 어디에 속하는가?

 훗날 공부를 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두려움도 슬픔도 나의 몫이다. 나의 마음자리만 놓치지 않으면 무엇을 만나도 다 주인공이다. 나는 나의 주인공이고 귀신은 귀신의 주인공이다.

중국인에게 귀신은 자연신 하늘신에 가깝지만, 유독 한국인에게 귀신은 조상신에 가깝다. 가족 유대가 강한 우리는 사별하고도 끈끈한 유대관계를 가지는지 모른다.

귀신같이 안다는 말은 귀신이 긍정적으로 쓰인 말이다. 쓰기 나름이다. 절대긍정이란 현상들을 일단 그 자체로 인지하고 어느 상황에서나 자기 몫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내가 할 몫이 무엇인지도 마음의 중심에서 결국 나 자신이 알려준다. 칼 융은 ‘의식과 무의식의 작동 원리는 한 마음으로 다를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내가 나를 이해시키는 과정이 마음이다. 정신 차릴 일이다.

lampeer(2021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