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mpeer 명상기록

물어야 답이 있다

lampeer 2019. 11. 28. 09:39

물어야 답이 있다

 

<금강경>의 키워드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이다. 정해진 법이 없다는 뜻이다.

붓다가 관찰한 세계인 무상법(無常法)의 변주이다. <반야심경>의 ‘무노사역무노사진’ 즉 늙고 죽음도 없고 늙고 죽음을 마침도 없다는 것 역시 무상법의 변주이다. 용수보살은 아예 공(空)사상을 설립해 놓았다. 그래서 용수 보살의 저술들은 끝까지 읽어도 아무 것도 잡지 못하게 부정의 부정을 거듭한다. 그걸 사구백비라고 한다. 4구절씩 게송으로 백 가지 ‘아니오’를 한 것이다. 무상(無常)하더라도 무상을 인식하는 주체인 식(識)은 있지 않냐고 물은 사람들이 불교 요가수행자들인 유가사들의 유식학이다.

인도 불교는 중국에 와서 전통 도가(道家)의 무(無)와 융합해서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  되었다. 노자의 <도덕경>은 ‘말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로 시작한다. 매우 심오하여 탈속 출세간의 마음으로 읽기에 좋으나, 이는 통치자를 위한 설법이지 민중을 위한 설법이 아니다. 백성의 침묵은 봉건지배자에게 편리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노자<도덕경>은 스스로 지도자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텍스트로서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용수불교와 도가의 합이 낳은 중국 선불교는 그 논리의 심오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와서 무(無)의 극치를 이룬 것 같다.

불교 최초의 경전인 <숫타니파타>는 붓다와 제자들의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붓다는 마지막 죽어가는 자리에서도 제자들에게 질문할 것을 권했다. 불교의 요가수행자들의 기록인 <해심밀경>에도 깨달음을 구하는 보살의 관찰법에 ‘듣고 사유하고 실천한다(聞思修)’는 내용이 있다. 사유는 스스로 깊이 하는 질문이다.

부단히 현재를 살아가면서 말할 때 말하고 침묵할 때 침묵하라는 것이 진정한 무유정법의 뜻이다. 몸을 묶고 입을 묶고 마음을 묶어 침묵해서 삼배만하면서 질문을 멈추면 아무 것도 나아갈 것이 없다. 붓다가 가르친 사마타(止)의 멈춤은 질문을 멈추라는 것이 아니라 진짜 실제를 관찰하기 위해서 산란하거나 게으른 마음, 욕심과 성냄 어리석은 마음을 멈추라는 것이지 질문을 멈추라는 것이 아니다.

‘말할 수 있는 만큼 안다.’는 말도 있다. ‘앞으로 나아가라’는 서양의 사고방식이 우주시대를 나았다. 그들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지구밖으로 나가는 여행선을 시도하고 있다. 인간을 구할 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참으로 묻고 시도할 일이다. 아무 것도 묻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질문은 등불과 같다. 질문을 잃으면 길을 잃는다.

lampeer(2019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