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의 힘
신념의 힘
1903년 12월 17일은 라이트 형제의 첫 유인(有人) 동력 비행기 플라이어(Flyer) 1호가 하늘을 날아 비행에 성공한 날이다. 이로써 하늘을 나는 인류의 꿈이 실현되었다. 그들은 고정날개 항공기를 조종할 수 있게 만든 최초의 사람들이다.
윌버 라이트(1867-1912)와 오빌 라이트(1871-1948)는 1892년 자전거 가게를 하다가, 1896년 자전거 생산 회사를 차렸으며, 1899년에는 글라이더 대신 항공공학 실험을 시작했다.
이들에게 비행기 제작을 자극한 것은 하버드 대학 교수이자 스미소니언 연구소(Smithsonian Institution) 소장인 새뮤얼 랭리(Samuel Langley)가 1896년 무인 증기항공기의 비행을 성공시킨 것과, 시카고 항공공학의 권위자 옥바트 차누트(Octave Chanute)가 미시간호의 모래사장에서 글라이더를 시험한 것, 유럽에서 오토 릴리엔탈(Otto Lilienthal)이 글라이더 추락으로 인해 사망한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라이트 형제는 독자적인 연구만으로는 도저히 어렵다고 판단하여 랭리 등이 있는 미국 스미소니언 과학협회를 찾아가 전문적인 과학자들에게 여러 정보를 듣기도 하며 열심히 노력한다.
무수한 비행과 시행착오를 거치며 윌버는 실망감에 휩싸여 오빌에게, “인간은 분명 날겠지만, 우리들이 살아있을 때는 아닐꺼야.” 라고 한 적도 있다.
결국 라이트 형제는 1902년 항공기 조종에 대한 특허권을 취득했다. 첫 유인비행기 플라이어 1호는 일천 달러 미만의 예산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예산은 새뮤얼 랭리의 ‘그레이트 에어로돔’이 사용한 5만달러와 대비된다. 하지만 1903년 10월과 12월에 시험 비행했던 랭리의 유인(有人) 에어로돔Aerodrome은 실패했다.
라이트 형제의 성공을 믿을 수 없었던 scientific American 그룹과 랭리에 의해 1904년 7월에 랭리와 라이트 형제의 비행 대결이 펼쳐졌다. 2만 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랭리의 동력비행기는 힘없이 강물에 추락했지만,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는 400미터 위를15분간 날았다.
미국 언론은 "라이트 형제 하늘을 날다!"라고 보도했다. 국가적 지원을 받은 최고 과학자의 명예를 떨치지 못하고, 패배의
충격을 이기지 못한 랭리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폐인처럼 지내다가 오래지 않아 사망했다.
미국 최고 연구소의 최고 과학자였던 랭리의 실패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는지, 주류가 아닌 라이트 형제에 대한 홀대와 비방은, 나중에 허위임이 밝혀진 스미소니언 측의 특허권 도용 주장과, 중앙 지역의 언론계 등 매우 전방위적이었던 것 같다.
선망받는 과학자였던 랭리의 에어로돔(Langley Aerodrome)에 5만 달러나 사용했던 미국 육군은 비행기를 오하이오 주의 알지 못하는 두 형제에게서 구입하는데 주저가 많았다. 이 후 다른 항공선구자들은 언론의 관심을 받으며 활동했지만, 라이트 형제는 포기하지 않고 어두운 곳에서 계속 그들만의 작업을 이어 나갔다.
라이트 형제는 부유하지도 않았고 정부 지원을 받는 과학자들도 아니었으며 비행기 사업이 생계와 직결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전 생애를 걸고 비행기 제작에 몰두했다. 두 형제 모두 결혼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부인과 항공기 모두를 위한 시간은 없다.”라는 윌버의 말 속에 담겨 있다.
시험비행 중 추락으로 큰 부상을 당하기도 했고 사업적 성공을 거두기도 했던 윌버는 1912년 5월 30일 집에서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 윌톤(Wilton)은 일기에 아들 윌버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짧은 인생, 수 많은 결과, 지지 않는 지력, 조용한 태도, 굉장한 자신감과 겸손, 옳은 것을 바로 볼 줄 알고 끊임없이 가치를 추구했고, 그는 그런 인생을 살았고 죽었다.’
동생 오빌이 연구와 사업을 이어갔으며 오빌의 사후 10년이 흘러서야 미국에선 라이트 형제 붐이 일어난다. 2차대전 승리 후 영국을 대신하여 미국이 부상하며,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의 인물로 뒤늦게 라이트 형제를 찾아 나선다. 라이트 형제의 전기가 출판되고, 홀대하여 영국에 전시 중이던 플라이어 1호를 반환하라는 요구도 한다.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는 하버드대학을 중퇴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젊은 시절 상황이 아주 열악했다. 중요한 것은 상황이나 명예보다 자신의 꿈을 자신의 신념을 믿고 계속 나아갔다는 것이다.
사이먼 사이넥은 ‘랭리의 불행은 비행기의 발명이 명예와 성공에 초점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굳이 혹평을 피하더라도 랭리는 치열한 경쟁, 쫓기는 경쟁 중에 원래의 꿈과 목표를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랭리가 비행기 연구를 참으로 좋아했다면 라이트 형제를 배제할 것이 아니라 함께했을 것이며, 인류가 비행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왕의 성과를 이어서 자신의 연구를 발전시켜 나갔을 것이다.
어떤 조건에 처해지든, 자기가 믿고 꿈꿔 온 것을 행하는 것, 시작도 끝도 자신을 믿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신념의 힘임에 틀림없다.
lampeer(2017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