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의 정수(精髓), 겨레의 사표 거인 우당 이회영
민족주의의 정수(精髓), 겨레의 사표
거인 우당 이회영
식민지 시대 우리 독립운동사에 3대첩인 봉오동전투, 청산리 전투와 대전자령전투는 3,500명의 독립군을 양성한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항일 무장 투쟁과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에 우당 이회영 일가와 석주 이상용 일가라는 개별 가문의 전적인 희생과 기여가 있었다는 사실은, 한 가문의 애국적 의지(意志)가 기로에 선 한 국가의 운명에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놀라운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1910년 8월 서간도 지역을 둘러 본 우당이 가족회의를 열어, 대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지언정 집안이 왜적 치하의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하게 도모하지는 않겠다는 결의를 하고, 6형제 모두가 가족 집단 망명 계획을 세우고는 1910년 12월 30일 눈보라를 마주하며 압록강을 건너 망명을 감행한 것, 게다가 현시가로 600억원에 이르는 일가 재산을 모두 국가의 독립을 위해 바친 것은, 한국판 노블리스오빌리제의 찬사를 넘어 세계 역사를 찾아봐도 드문 가족영웅사가 아닐까 한다.
1907년 4월 안창호 신채호 김구 등과 함께 국내 애국지사들의 최대 비밀 항일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하였던 이회영은 만주 서간도에 ‘신영토’로서 토지를 구입하고 여기에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투쟁으로 국권을 회복할 것을 계획하고, 이를 실천하고자 전 가족을 독립운동에 투신케 하는 결단에 이른 것이다.
1911년 간도에 이주한 우당은 ‘경학사’라는 독립운동 주민단체를 만들고, 그 안에 중국토착민들과 일본의 눈을 피해 ‘신흥강습소’라 이름붙인 학교를 세워 민족의 독립운동을 위한 교육에 돌입한다. 그 후로도 십여 개의 학교를 더 세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1912년에는 새로운 터전인 천연의 요새 합니하(광화진)로 옮기고 내부에서는 ‘신흥무관학교’라는 무장 독립군 양성을 시작한다.
이후 신흥무관학교는 십년간 3,500명의 무관을 배출하여 항일독립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서로군정서, 의열단, 고려혁명군, 대한의용군, 조선혁명군, 대한독립군, 한국광복군 등 무장투쟁의 핵심이 되었다.
이 과정에 이회영과 동생 이석영 등의 전 재산이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운영자금, 생도들의 경비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회영 자신도 무장 독립투쟁에 직접 투신한다.
1932년, 만 65세 노인의 노구로 가슴에 권총을 품은 채 영국선적의 배 밑창인 4등 선실에 몸을 싣고 상해에서 만주로 무장투쟁을 결행하다가 일본 밀정인 사촌 조카의 밀고로 려순 감옥에서 교형당하기까지 그의 인생은 오로지 조국과 민족의 독립에 모든 것이 맞춰져 있었다.
여순 감옥 구지박물관에는 1910년 교형당한 안중근 의사의 영정과 1936년 고문사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영정이 있으며, 이회영 선생의 영정도 모시는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2000년 1월 12일 중국정부는 이회영 선생에게 조선족으로는 유일하게 혁명열사 증서를 수여하였다고 한다. 여순 감옥은 민족의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는 전공 학생들의 필수 답사코스로 지정됨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조판서의 아들로 태어나 과거시험을 거부하고 실천적 양명학의 실용유학을 주장한 자, 머슴에게 존댓말을 쓰고 집안 여성의 재혼을 실천한 평등주의자, 일본의 폭압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 밀사를 기획한 자, 1905년 일본의 을사늑약 후 조선 귀족에 대한 회유를 거부하고 조선의 자주 독립을 인생의 목표로 삼은 자, 이를 위해 명예와 가족과 재산을 모두 바쳤고 이로 인한 극도의 역경 속에서도 자존과 저항의 정도(正道)를 지켜간 자, 임시정부의 요인이 되어 정치적 권력을 취하는 것보다 독립운동 자체에 집중하기 위하여 단재 신채호등과 의기투합하여 아나키스트로서 무장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들은 자, 큰 아들이 중국에서 사망하고 두 딸을 고아원에 맡기고 아내마저 고국에 돌아가 삯일로 얻은 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내는 역경을 거치면서도 조국의 독립만을 위해 인생을 바친 자, 독립 운동과정에서 자유협동체론 주장과 독립된 조국에 대한 지방분권주의 구상 등 시대를 앞서 간 평화와 민주 공화주의자, 동기의 순수성을 중히 여기고 목적과 수단을 일체화하는 리얼리스트...(*김삼웅 ‘이회영, 그는 누구인가’ 참조)
인터넷을 통해 우당이 난(蘭)친 것을 찾아보니 난잎 다발이 힘차고 뚜렷하고 풍성하고 휘어진 선들이 빼어난데, 난꽃들은 뿌연 그림자처럼 난잎들 뒤로 배경처럼 숨어 있다. 우당의 삶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아름다운 향기도 모습도 모두 탈색해서 난잎 줄기와 뿌리들을 풍성하게 하면서 자신이 성취한 모든 것들로부터도 자유롭게 숨어서 허공에 희미하게 빛나는 꽃! 그림마다 높은 절벽 위와 땅 위에 동시에 그려진 난초는 우당이 이상과 현실에서 리얼리스트로서의 균형을 잃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나의 모든 것을 바쳐 조국과 민족을 살리고.... 그리하여 민족은 영원하리라 !’ 우당은 이렇게 말하며 여순 감옥에서의 모진 고문에도 아무 발설을 않고 죽음으로 마지막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을까?
‘역사는 기억하고 아는 만큼 전진한다.’고 한다.
명예도 가족도 재산도 자신의 목숨마저도 모두 조국을 위해 바친 진정한 민족주의자!
나는 우당 이회영의 삶 속에서 민족주의의 정수(精髓)를 보고, 시대를 앞서 우리민족의 비전을 실천해 갔던 우리민족 겨레의 사표로서, 거인 우당 이회영을 기억하고 그 극히 일부분이나마 닮아 보고 싶다. (2016년 12월 27일)
유경 (마인드랩 대표)